‘독감 경보’ 지구촌 떨고 있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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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 푸젠 맹위 떨치며 불안감 확산 ‘대유행’ 전망은 엇갈려
그야말로 공포의 나날이다.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살벌한 독감 기사 탓이다. ‘살인 독감 동남아 공격’ ‘살인 독감 확산-지구촌 비상’ ‘어린이 집중 감염, 치사율 높아’…. 기사 제목만 놓고 보면 금방이라도 독감이 와락 달려들 것만 같다. 기사 내용은 더 오싹하다. ‘이번 독감은 확산 속도가 빨라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1918∼1919년 스페인 독감이나, 올해 초 전세계를 강타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처럼 치명적….’

언론이 서둘러 경보음을 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지난 10월 초부터 독감 바이러스 A형 푸젠이 유럽과 북미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12월8일 현재 영국에서만 어린이 7명이 사망했다), 최근 동남아(타이완)에서도 A형 푸젠 환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 초 세계보건기구가 예측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A형 푸젠이 빠져 있어, 미처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일부 언론의 보도 내용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12월4일 국립보건원은 A형 푸젠은 ‘살인 독감’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과연 독감이 무엇이기에 해마다 이맘때면 언론은 호들갑을 떨고,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오금을 저려야 하는 걸까. 수천 년간 인간을 괴롭혀온 독감의 정체를 추적했다.

독감 바이러스는 ‘둔갑’의 명수 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독감 바이러스) A·B·C형에서 비롯한다. 이 바이러스들은 적도나 아열대에서 발생한 뒤 남반구와 북반구로 전염되는데, 매개체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유럽·북미는 독감 바이러스가 가장 좋아하는 서식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10∼4월에 발생하고, 주로 12∼1월에 위세를 떨친다(지난해에는 12월 초에 기승을 부렸다).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의학자들은 독감 바이러스를 박멸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바이러스가 둔갑(돌연변이)을 잘하기 때문이다. 백신을 개발하면 곧바로 다른 성질로 전환하는 것이다.

의학자들은 이 돌연변이를 소변이와 대변이로 나누어 부르는데, 소변이는 외모만 성형수술을 했다고 보면 된다. 보통 2,3년에 한 번씩 발생하는데, 1997∼1998년에는 A형 시드니가 유행했고,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는 A형 파나마가 유행했다. 그러나 올해 A형 파나마는 A형 푸젠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A형 뒤에 붙는 푸젠이나 파나마는 변이된 독감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한 지역을 뜻함).

반면 대변이는 외모는 물론 혈액형·유전자까지 바꾸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한마디로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대변이가 나타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성질과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어 백신을 만들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감염자와 사망자가 속출한다. 1918년에 5천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과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1977년 러시아 독감 등이 여기에 속한다(96쪽 ‘환경과 건강’ 참조). 그러나 다행히 발생 횟수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독감 바이러스가 A·B·C형으로 나뉘는 이유는 유전적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쉽게 A형은 김씨, B형은 이씨, C형은 박씨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A형 파나마와 A형 뉴칼레도니아는 같은 김씨인데, 본(本)이 다른 셈이다. 새로 등장한 A형 푸젠도 마찬가지이다. 의학자들은 A형 바이러스가 B·C형보다 더 ‘악질’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몸을 더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독감으로 인한 사망 원인은 주로 급성 호흡기 감염증(폐렴)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전국민의 10∼20%가 독감에 걸리고, 그 가운데 약 8%가 목숨을 잃는다. 전세계에서는 연간 2만명 정도가 독감에 걸려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치명적이지만 독감 바이러스에게도 약점은 있다. 홀로 서기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드시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가 있어야 기생할 수 있다.
달걀로 만드는 백신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2월, 각 나라의 인플루엔자센터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소변이를 예측한 뒤, 그 해 겨울 북반구에서 유행할 독감 바이러스를 발표한다. A형 파나마·A형 뉴칼레도니아·B형 홍콩이 올해 세계보건기구가 예측한 인플루엔자이다. 이같은 발표에 따라 개발에 들어간다. 백신은 다른 약처럼 화학식을 이용해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선 달걀 노른자 수천 개에 그 해 유행할 바이러스를 뿌린다(특이하게도 독감 바이러스는 노른자에서 잘 자란다). 바이러스가 증식하면 강제로 독성을 제거해 ‘순수한 바이러스’로 만든다.

이것을 화학 약품으로 처리해 병에 집어넣으면 비로소 백신이 된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걸리는 기간은 약 6개월. A형 푸젠이 설치는데도 백신을 만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신을 만들어 보았자 지나간 버스 세우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A형 푸젠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의학자들은 A형 파나마 백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조사 결과 A형 파나마 백신은 A형 푸젠에도 면역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몇 %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몇몇 의학자는 50% 정도로 추측한다. 그러나 A형 푸젠이 더 위력을 떨치면 그 수치는 더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신을 맞으면 왜 독감에 안 걸리거나 덜 걸릴까. 원리는 간단하다. 순수 바이러스라 할지라도 일단 우리 몸안에 들어오면 면역 체계가 항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대부분 2주 뒤 생성). 그러니까 나중에 독성 있는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운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백신의 독감 발병 저지율은 약 70∼90%, 나이·성별·신체 상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올해 독감 백신을 맞은 한국인은 약 1천5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대변이 언젠가 온다” 의학자들은 A형 푸젠에서 감시의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한다. “몇 년 안에 대변이로 인한 독감이 대유행할 수도 있다.” 근거가 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독감 바이러스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러시아 독감이 사멸된 지 26년이 지났으니까, 유행할 때가 된 셈이다.

슈퍼컴퓨터에 여러 자료를 입력한 결과 2008년에 대변이에 의한 독감이 유행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 의학자는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며 무시했다. 그들은 오히려 지난 4월 네덜란드에서 잠시 유행한 조류 독감을 주목한다. 사스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유행의 전조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한 의학자는 말했다.

대변이 독감의 발생지는 아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 남부의 광둥성이나 홍콩이다. 1997년 조류 독감에서 보듯 그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독감 바이러스의 매개체인 닭·오리·거위 같은 조류를 기른다. 당시 조류 독감에 걸린 환자 18명 가운데 6명이 죽었다. 처음 겪은 질병치고는 피해가 적었지만, 사망률은 일반 독감의 4배가 넘었다.

낙관적인 의학자들은 대변이가 일어나도 피해가 예전처럼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감시 체계가 잘되어 있어 미연에 확산을 방지할 수 있다.” 반대 의견도 적지 않다. 그들은 말한다. “과거에는 독감 바이러스가 자동차와 배의 속도로 전염되었지만, 지금은 비행기 속도로 전파된다. 사스에서 보듯이 손쓸 틈 없이 전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한다. 독감 바이러스가 럭비공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A형 푸젠에 대한 공포감이 퍼지자 국립보건원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A형 푸젠이 여느 A형 독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흉측한 독감 바이러스가 언제 또다시 찾아와 ‘핏빛 전쟁’을 벌이자고 덤빌지 모른다. 그 싸움은 간혈적으로, 그리고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도움말:김남석 교수(서울아산병원·감염내과)·김우주 교수(고려대 구로병원·감염내과)·김의석 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감염내과)·송호진 전문의(세란병원·전문의)·김영택 연구관(국립보건원 방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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