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화룡점정 ‘맛있는 그릇’
  • 이영미 (문화 평론가) ()
  • 승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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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도 처리해야 할 일들에 쫓겨 허둥지둥 보내면서, 이러다 삶의 마지막도 이렇게 맞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음식 이야기도 이번으로 마지막이지만, 나는 여전히 허둥지둥하고 있다. ‘음식 이야기’ 난에 글을 쓴 지 벌써 만 2년이 넘었고, 지금 50회째를 쓰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편집장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두어 편 써보겠노라고 시작했는데, 의외로 술술 글이 나왔고 재미도 있었다.

음식 평론가도 아니고 요리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글을 썼다. 나는 외도를 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20년 동안 내 입맛을 키워준 엄마와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어서, 그리고 20년 동안 내가 만든 음식을 열심히 먹어준 남편에게 새삼스레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이 난이 정말 고마웠다. 이 난을 위해 애써주신 많은 분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마지막이니 좀 호사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 다름아닌 그릇 이야기이다. 그릇이야 그냥 음식 담는 용기일 뿐이지만, 음식과 짝이 맞는 기분 좋은 그릇은 밥상 앞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결혼한 지 20년이 되니 혼수품 그릇은 거의 사라지고 새 그릇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살림이 서투르고 비좁은 단칸방 부엌에서 일하다 보니 이래저래 많이 깨먹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이사를 다니던 때에는 그릇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기도 이천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그릇을 조금씩 사기 시작했다. 지금 내 찬장은 청자·백자·분청사기 같은 그릇들로 가득 차 있다.

하필 이런 것들로 채우게 된 것은, 오로지 내가 이천에서 도자기 하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천에는 청자나 분청사기가 개밥그릇으로 굴러다닐 정도로 도자기가 흔한데, 그러다 보니 나도 도자기를 보는 눈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청자·백자·분청사기 같은 그릇은 대중적인 서양식 도자기 식기에 비해 화려한 맛은 없지만 이천의 흙집, 닥나무 한지를 바른 벽, 나무 싱크대, 돗자리 깔린 바닥과는 이 수수한 색감이 훨씬 잘 어울린다.

밥상을 차리기에 가장 좋은 그릇은 역시 백자인 듯하다. 하얀 그릇은, 김치 한 쪽을 놓아도, 시금치 나물 한 젓가락을 놓아도 음식을 화려하게 돋보이도록 만들어준다. 하지만 막상 그릇으로 보기에는 심심하다. 그래서 백자에 양각(陽刻)한 무늬를 넣거나, 회색 빛 상감으로 무늬를 넣어 공을 들인 그릇이면 식기로는 정말 환상적이다.

분청사기는 찻잔으로 쓸 때가 가장 좋다. 청자나 백자처럼 깔끔하지 않고, 붓질의 우연성이 살아 있어 무정형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 자유로움은 차를 마시면서 긴장을 푸는 그 기분과 잘 조화를 이룬다. 조금 거친 듯 부드러운 촉감의 분청사기 찻잔에 따뜻한 차를 담고, 손으로 만지작거릴 때의 만족감은 비할 것이 없다. 거기에 따뜻한 새해 햇살이 기분 좋게 비춰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이영미 음식 이야기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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