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 전 편집인 특별기고
  • 안병찬 전 편집인 ()
  • 승인 1999.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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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붓으로 쌓아올린 10년 역사-‘독립 언론’의 자부심으로 저널리즘 원칙 지켜… “취재=현장주의, 기사 작성=리얼리즘”
<시사저널>은 민주화 시대를 여는 90년대 길목에서 태동했다. <시사저널>의 창간 준비 조직이 정식으로 시동한 것은 10년 전인 89년 1월9일이다. 고통스러웠던 격동의 80년대에 고난의 길을 걸어온 언론인들과 직언·직필의 직업 언론인들이 모였다. 편집국 구성원은 이른바 ‘모래 시계 세대’라고도 불리는 386세대가 주축을 이루었다. 그 기자들은 시대적 감수성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열정을 불태울 준비를 했다.

시사 정보·탐사 분석이 중심축

<시사저널> 창간 구성원들은 우선 한국 주간 저널리즘에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목표에 부합하는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 했다. <시사저널>의 좌표는 시사 정보와 탐사 분석이라는 두 변수가 만들어내는 정삼각형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대신 흥미거리나 선정 폭로 요소는 배제해야 한다. 정체성의 관건인 좌표는 그렇게 설정했다.


더 큰 명제는 창간 정신과 실천 의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발행인을 비롯한 창간인들은 다음과 같은 삼행문으로 이를 담아냈다. ‘<시사저널>은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히며,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정론과 균형과 화합에 바탕을 둔 독립 언론을 강조한 푯말이다.
“시각적으로 생각하자”

정통 시사 주간지로서의 판(포맷)과 체제를 결정하는 일은 뒤이은 과제였다. 이른바 ‘시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전면 컬러로 제작키로 한 것은 의욕적이고 모험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미술적 요소를 제작의 중심에 두는 것을 의미했다. 89년 4월25일자 편집국 기자직 발령 제1호는 젊은 미술 기자였다. 기획의 첫 단계부터 미술 기자를 참가시킨다는 창간 의도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편집국 제작 체계를 검토할 차례였다. 그 결과는 <시사저널> 고유의 ‘지면 구축 삼각회의’ 확립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시사 주간지인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구성 회의(shaping meeting)’를 참고하여 우리 식으로 재구성한 보도 편집의 기본 장치였다. ‘정보 수집 과정’인 기사 취재에 주로 의존하는 일반적 관행을 뛰어넘어 삼각 논의를 통해 ‘정보 수집 및 처리 과정’을 시각적으로 정치하게 설계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하나하나의 기사 항목과 하나하나의 지면은 취재-미술-사진 세 부서의 담당자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교차 논의를 한 후 확정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다양성의 조화미를 시각 뉴스 보도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언론은 2 개의 수레바퀴로 굴러간다. 독립 언론의 지평을 열겠다는 신념이나 열정은 ‘저널리즘 원칙’이라는 바퀴를 만든다. 이 저널리즘 원칙은 ‘시장 경쟁 원칙’이라는 또 하나의 바퀴와 때때로 상충한다. 그러나 바퀴 2개는 평행을 이루되 나란히 굴러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시장 경쟁 원칙의 핵심 요소는 구독자와 광고 시장이다.

<시사저널>이 새로운 형태의 영업 정책을 개발하여 구축한 것이 이른바 ‘정기 구독자 계좌망’이다. 이 계좌망은 <시사저널>이 신뢰를 얻을 때만 구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89년 10월19일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온 <시사저널> 창간호(10월29일자)는 이 땅에 새로운 시사 주간지의 출현을 알렸다. 다행히 독자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했다. 이틀 만에 가판의 50%가 팔렸고 정기 구독자가 만명을 돌파했다. <시사저널>이 시사 주간지로서 짧은 기간에 최대의 정기 구독자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시사저널> 편집국과 지원 부서라는 두 바퀴의 균형, 품위 있는 종합 시사 주간지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어우러진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90년 가을에 이미 10만 계좌를 돌파한 정기 구독망은 창간 1주년인 10월16일에 10만4천1백81 계좌에 이르러 잡지 사상 유례 없는 기록을 세우며 단번에 국내 최고의 시사 주간지 자리를 확립했다.

“마라톤 풀 코스 뛰듯 기사를 쓴다”

기사를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시사저널>은 실사 구시의 보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한 이치’에 온 힘을 쏟았다. 이 원칙은 저널리즘의 요체인 취재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의 리얼리즘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시사저널> 기자들은 단거리를 달리는 조급증을 경계하며 중·장거리 선수처럼 뛰고자 했다. 기획성을 바탕으로 하는 심층 기사·탐사 기사·고발 기사를 넘어서 기록문학 기사(르포르타주)나 저널리즘 역사 기사의 수준을 지향하자면, 일반 기사문 쓰기에 비해 숨이 길어야 한다. 작은 예를 든다면, 94년 삼복 더위 속에 제주도에서 열린 제4회 철인 3종 경기를 취재할 목적으로 마라톤 전 코스 42.195㎞를 7시간 10분에 주파한 기자도 있다. 픽션을 거부하고 몽상이나 서정주의의 충동을 극복하고 냉철한 숫자와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명증을 작품에 용해시킨 한 선각자의 글쓰기를 <시사저널> 기자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이처럼 마라톤 풀 코스를 뛰듯 기사를 쓰려고 했다.

어떤 문장이 참된 것임을 증명해 주는 근거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실이야말로 경험을 기술하는 문장의 요체이다. 치밀한 현실감을 구비한 사실과 진실의 하나하나가 합쳐져 더 큰 물줄기를 이룰 때 저널리즘은 기록 문학의 역사성을 얻게 된다.

그렇게 8년 동안 두 바퀴로 달려온 <시사저널>은 2년 전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로 가혹한 시련기를 만났다. 그 고난과 인고의 19개월을 이겨낸 힘은 한 짝만 남은 ‘저널리즘 원칙’의 수레바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덧 386세대에서 486세대, 신 기성세대가 된 기자들과 일부 지원 부서 직원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시사저널>을 지켜냈다. 더러는 흩어졌으나, 어떤 기자는 다른 곳의 취업 제의를 뿌리치며 <시사저널>을 지킨다는 소식도 들렸다.
시대의 굽이침 간직한 <시사저널>

창간 10주년을 기해 <시사저널>은 견실한 ‘전문 언론 기업’을 만나 새로운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세기 말에 재창간을 기하다니 그래도 축복받을 일 아닌가.

시사저널사 10층 회의실에는 대하가 흐르고 있었다. 창간호로 시작해서 한 주일 간격으로 세상에 나온 <시사저널> 표지를 낱낱이 표구해 가지런히 진열하니,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운 표지의 배열은 마치 강줄기가 흐르는 듯 굽이쳤다. 지금도 523호까지의 표지가 10년의 연속적인 천변만화를 한 두름으로 묶어 파노라마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시사저널>은 다시 10년을 시작하는 출발선, 신세기에 진입하는 전환점에 서있다. 서울 충정로 1가 58번지 1 시사저널사를 지나다 보노라면 시대의 굽이침으로 언제나 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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