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막사발 재현하는 도예가 장금정씨
  • 경남 하동·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0.01.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지금의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 새미골(샘골). 경남 사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강·하·정·심 씨 등 새미골 도공 80여 명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의 무인들은 조선 도공이 밥그릇으로 가져간 막사발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

부드러운 담황색 살결에 투박하고 거친 표면, 유약이 불규칙하게 번진 자국이 만들어낸 꽃무늬와 사발 안바닥에 포개 구운 흔적이 있는 막사발. 일본인들은 이 사발을 이도차완(井戶茶碗:하동 샘골의 찻그릇)이라고 이름 지은 뒤 진귀한 예술품으로 삼았고, 훗날 일본 국보로 지정했다. 조선의 서민적이고 대중화한 밥그릇이 일본에서는 돈으로도 못사는 예술품이 된 것이다.

4백년 세월이 흐른 뒤 한 30대 여인이 하동 새미골에 흘러들었다. 도공이 되기로 작정한 이 여인은 폐허가 된 새미골에서 직접 가마를 만들고 불을 지폈다. 실패를 거듭하며 25년 세월을 버텨온 끝에 드디어 4백년 전 조선 막사발의 아름다움을 재현해 냈다. 바로 도예가 장금정씨(60)가 그 주인공이다.

장금정씨는 1940년 하동 새미골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사천에서 유복한 집안의 2남 5녀 중 둘쨋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부모가 1년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때부터 시집 간 언니 대신 가장 노릇을 하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1967년 결혼해 행복을 찾았지만 6년 만에 남편이 죽어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뒤 아들 딸과 함께 기댈 곳 없는 마음을 추스르던 30대 중반. 장금정씨는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할아버지 방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밥상 위에 올랐던 질박한 그릇을 떠올렸다. 이 땅의 서민이 날마다 밥그릇 국그릇으로 쓰다가 이가 빠지면 개밥그릇으로, 버리면 거렁뱅이가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막사발. 일본에서는 막사발이 다기로 예술품으로 꽃을 피웠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식 식기와 접시에 밀려 맥이 끊긴 것이 안타까웠다.

좌절 끝에 되살려낸 ‘꽃핀 눈박이 사발’

마침 한국과 일본 학자에 의해 하동군 진교면 새미골이 이도차완의 고장임이 밝혀지자 장씨는 막사발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옛날부터 ‘사기 마을’이라 불리던 새미골에 산죽(山竹)으로 지붕을 인 옛집을 사들였고, 마을 사람을 모아 흙을 빚어 가마를 만들었다. 그러나 청자나 백자라야만 귀한 줄로 알고 매끈한 그릇에만 눈을 돌리는 세태여서 막사발을 만들어 보아야 돈이 되지 않았다. 주변의 몰이해와 소외를 자처하는 일이었다.

장씨는 도자기 관련 책들을 참고해 너구리 가마(가마의 모양이 너구리가 웅크린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라고 불리는 전통 가마를 복원하고, 이도차완의 고향이라는 뜻에서 하동 정호 향요(河東 井戶 鄕窯)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막사발 재현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가마를 세 번이나 부수고 다시 지었지만 제대로 된 그릇은 나와주지 않았다. 1200℃ 장작불에서 굽는 막사발은 조금만 불길이 잘못되어도 터져버리곤 했다. 장씨는 전국의 가마들을 찾아 다니며 기술을 배웠지만, 자신이 빠져들고 기대했던 아름다운 막사발은 빚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새미골 도공의 후예가 살았다는 일본 시모노세키의 하기시(萩市)·가고시마(鹿兒島)·다지미(多知見)에서 장작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조선 도공의 정신이나마 느끼고자 했다. 2년 뒤 장씨는 큰 깨달음을 안고 돌아왔다. 하동 새미골의 바람과 흙과 물로 빚지 않고서는 자신이 기대하는 막사발을 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수년이 흐른 뒤 장씨는 장작불을 쓰는 전통 가마로 4백년 전 조선 도공이 빚었던 것과 같은 막사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막사발에 ‘이도차완’ 대신 ‘꽃핀 눈박이 사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유약의 불규칙한 번짐과 마름이 꽃처럼 피고, 사발 바닥에는 가마에 겹쳐 쌓을 때 그릇 사이에 끼우는 작은 흙덩이를 떼어낸 경단 자국이 난 데서 눈박이(말똥말똥한 어린아이의 눈 같은 모양)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매끈하고 완전한 그릇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량품으로 치부될 그 사발을 만드느라 장금정씨는 25년 세월을 바친 것이다. “담황색 부드러운 표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윽한 연륜의 고색을 띠게 됩니다. 미세한 숨구멍들을 통해 그릇이 숨을 쉬는 것이고 이것이 차맛과 음식맛에 독특한 풍미를 더합니다.” 장금정씨의 막사발 예찬론이다.

수백여 개 그릇 중에서 한두 개 나올까말까 한 꽃핀 눈박이 사발. 하동의 흙과 물과 불이 대숲을 지나는 바람과 결합하고, 여기에 도공의 손길과 정성이 맞물릴 때 비로소 태어나는 꽃핀 눈박이 사발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구울 수 있는 것이다. 장금정씨의 막사발은 지금 간결한 조형과 담황색의 부드러운 살결로 특징지어지는 조선 시대 분청사기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씨가 막사발에 빠져 있는 동안 변화도 많았다. 25년 전 한 채뿐이던 새미골 가마의 건물은 16채로 늘었다. 일을 돕던 마을 아낙들이 새댁에서 할머니가 되는 동안 장씨는 아들과 딸을 결혼시켰고, 1995년에는 일본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막사발을 대중화하려고 서울의 중소 백화점에 무리를 해서 상점을 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번 돈은 모두 새미골에 투자했다. ‘막사발 전시관’과 ‘금정 미술관’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막사발을 직접 빚을 수 있는 체험장도 만들었다. 수제자 박종태씨(27)와 일본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도예가의 길을 걷는 딸(정주영·27)이 그의 일을 이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4만5천평 넓은 도자기 마을을 혼자 운영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인 밥그릇은 역시 막사발”

21세기에도 막사발은 변함없이 한국인의 밥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장금정씨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의 소원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막사발 하나를 사용하게 되는 날을 보는 것이다. 서민의 그릇인 막사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닌 실생활에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꿈은 실현되어 가고 있다. 매년 벚꽃이 필 무렵 한달 동안 새미골 축제를 연 지도 3년째, 올해는 무려 2만명이나 다녀갔다. 장씨는 그때마다 거의 거저 방문객에게 막사발 하나씩을 들려 보냈다.

남편을 잃은 뒤 25년의 외로운 삶. 해질녘이나 한밤중 새미골 대숲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그는 “막사발이 있었기에 행복했노라”고 말한다. 막사발을 빚고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동안, 황혼의 감빛 같은 꽃핀 눈박이 사발을 떠올리며 행복했다는 것이다. “막사발을 사용하는 것은 커피 문화·접시 문화로 변질된 우리의 숭늉 문화를 찾는 길이자 한국의 전통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숭늉 문화가 회복되기를 염원하며 막사발 만들기 25년. 그는 막사발로 미래를 바꾸려고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