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4년 중임제로 개헌 필요"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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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국회의원 남북 문제 의식조사/63%가 개헌 찬성… 4년 중임제 선호 압도적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회의원 3명 가운데 2명 꼴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응한 여야 의원 가운데 63%에 이르는 1백17명은 최근 남북 관계 변화를 고려할 때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규정한 헌법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반해 현 제도를 그대로 두자는 응답은 절반 가량인 32.6%(63명) 선에 머물렀다. 개헌을 통해 권력 구조를 바꾸자는 입장은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68%로 한나라당 의원들(57%)보다 다소 높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개헌해야 하는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대답한 국회의원 가운데 무려 90.6%가 4년 중임제 개헌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정당 별로 보면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각각 94.3%와 93.2%라는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였다.

이원집정제·내각제 모두 공감 못 얻어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제외한 개헌 방안은 16대 의원들 사이에서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민주당 핵심 세력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에는 5.1%만이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개별 면담에 응한 의원들은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구조를 골자로 하는 이원집정부제는 변화하는 남북 관계를 고려할 때 부적합하다고 지적했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도 임기 중반부터 권력 누수가 빚어지면서 가뜩이나 국정 조정 기능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권력이 분산되는 이원집정부제로는 북한의 단일 지도 체제를 상대해 주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계를 풀어 가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였다.

또한 공동 정권 탄생의 매개체였던 내각제는 갈수록 천대받는 제도임이 확인되었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내각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자는 자민련 의원 가운데서도 2명뿐이었다. 이는 내각제를 줄곧 주장해온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참패하자 사실상 내각제 개헌이 물 건너 갔다는 자민련 의원들의 현실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내부에서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이라는 화두가 떠오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개적인 목소리는 주로 한나라당에서 나왔다. 지난해 9월부터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간헐적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김덕룡·이부영·손학규·김영춘 의원이 한나라당 내에서 개헌론을 제기한 주요 인사였다. 이에 대해 이회창 총재는 여권의 내각제 개헌론에 불씨를 지펴줄 것이라고 우려하며 번번이 논의를 제지했다.

그러나 4·13 총선 이후에는 이총재도 바뀌었다.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을 확보한 이총재는 지난 4월17일 “대통령제냐 내각제냐를 놓고 가부간 결단해야 할 시기가 오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도 생각해 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현행 5년 단임제는 임기가 중반만 지나도 레임 덕 현상이 오는 등 부작용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또 대통령 중임제 개헌 논의를 추진하는 주체는 김대중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총재가 중임제 개헌 논의를 꺼내자 당내에서 김덕룡·이부영 의원은 즉각 환영 의사를 표시하고 `정부통령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가세했다. 그러나 당시 여권이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공개적으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자 개헌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여야, 속마음 같으면서 서로 상대방 공격

그렇다고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개헌 논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 구조를 개편할 필요성은 집권당 쪽이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김대통령도 4년 중임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굳힌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당내 차기 대권 주자군에서 선두를 달리는 이인제 고문 역시 최근 개헌 논의에 불을 지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대통령 4년 중임제와 미국식 정부통령제로 개헌하자고 주장하면서 개헌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다양하게 펴고 있다. 산업사회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으로는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며, 냉전 시대 헌법으로는 남북관계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권력 구조만이 아니라 모든 헌법 조항을 현실에 맞게 고치자는 주장이다.

이처럼 여야는 내심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정략적 발상이라며 상대를 공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개헌 논의를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국민에게 장기 집권욕 또는 권력욕으로 비쳤던 어두운 정치사적 경험을 의식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잠복해 있는 개헌 논의가, 정상회담 성사 이후 남북 관계의 틀이 획기적으로 변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정치권 전반에 공감대를 더욱 확산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발의와 국민투표라는 절차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 16대 의원들 가운데 3분의 2 가까운 의원들이 개헌을 원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커다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이번 국회에서 개헌 논의에 대한 공론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권에서 헌법 개정 논의가 활발해진다고 해서 16대 국회에서 개헌이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권력 구조 개편에만 초점이 맞춰진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정권 재창출과 정권 탈환 수단으로 보는 여야의 동상이몽 때문에 각론에 들어가서는 사사건건 부딪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국가의 기본 틀을 이루는 헌법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려면, 권력 구조를 포함한 헌법 전반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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