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웹 전쟁, 유교에서 진행중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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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전쟁에서 위력 발휘…해킹 등으로 국가 전산망 교란·파괴
제1차 세계 웹 전쟁(World Wide Web War)이 벌어졌다. 전쟁터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진원지였던 발칸 지역이다. 아니 제1차 웹 전쟁이 일어난 전쟁터를 정확하게 말하면, 나토 회원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전산망이다.

전쟁은 갖가지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낳고, 그 기술은 전쟁을 확장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라디오를 선동 수단으로 기가 막히게 활용해 독일 국민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연합군은 영화라는 매스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이용했다. 베트남전 때는 텔레비전이 생생한 전쟁 현장을 실시간(real time)으로 세계에 중계했다. 걸프전 때는 CNN이 전황을 생중계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인터넷 시대 유고 전쟁에서는 웹 기술이 유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자 전쟁 무기로 떠올랐다.

세르비아계가 선제 공격…나토 인터넷 서버 맹폭

선제 공격을 한 쪽은 세르비아계였다. 나토 회원국들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공습을 시작하자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계의 해커들은 나토 본부·미국 정보국·미국 해군의 컴퓨터 시스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소보 공습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나토의 웹사이트가 3월28일 공습 이후 걸핏하면 꺼져버렸다. 나토 대변인 제이미 세어는 기자 회견을 갖고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있는 해커들이 나토의 서버를 해킹하거나 한꺼번에 엄청난 양의 전자 우편을 보내 시스템에 고장을 일으키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토 서버에는 하루 2천여 건이 넘는 전자 우편이 폭주하고, 유고슬라비아가 보낸 매크로 바이러스가 빠르게 자기 복제를 하면서 나토의 전산망을 파괴했다. 미국의 백악관·에너지부·내무부 홈페이지는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와 외설 사진으로 채워졌다. 세르비아에 근거를 둔 ‘블랙 핸드’라는 해커 집단들은 나토 소속 폭격기의 공습을 받아 폐허가 된 도시와 시체들을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국제 사회에 동정 여론을 일으켰다.

유고슬라비아가 벌이는 가상 전쟁을 이끄는 인물은 드라간 바실즈코비치(44). 캡틴 드라간이라고 불리는 이 세르비아인은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밀로셰비치와 싸워 패했으나 이번 전쟁에서 가상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자기 사무실을 재빨리 가상전 사령실로 바꾸고, 나토 공습으로 유고슬라비아 방송국마저 폭탄에 맞아 파괴된 상태에서 인터넷을 코소보 사태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을 알리는 유일한 심리전 무기로 활용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가 벌이는 가상전은 초보 단계이다. 한마디로 인터넷을 심리전 무기로 이용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웹은 지금까지 나왔던 커뮤니케이션 수단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첨단 해킹과 바이러스 기술을 가지고 웹 기술을 최대한 이용했다면, 나토의 전쟁 지휘 체계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 반대편에 있는 미국 본토를 대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세계 최강 전력을 자랑하는 미국에게 가상전은 어느 전쟁보다도 위협적이다. 가상전의 공격 대상인 전산망에 대한 의존도가 미국만큼 높은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전세계 컴퓨터 시스템의 42%와 인터넷 자원의 60%를 차지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가상 공간 안에 있는 나토 회원국 웹사이트가 무차별 공격을 받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즉각 반격을 지시했다. 세계 최고의 컴퓨터 기술을 가진 미국의 가상전 전력은 막강하다. 알바니아계 코소보 난민을 훈련시켜 유고슬라비아의 전산망과 전력을 차단하고 연료 탱크를 폭격해 비행기와 탱크에 들어가는 에너지원을 끊는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나토는 전쟁 초기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흑연 폭탄을 살포해 전력망을 상당히 파괴했다.

나아가 미국 해커들은 유고슬라비아 방공망 체계에 침입해 공습 대응 능력을 파괴하는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전략 근거지들도 공격 대상에 포함되었다. 나토는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은밀하게 갖고 있는 은행 계좌를 공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국은 올해 들어 전산망 방어 체계를 갖추는 것을 서두르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 작전을 지시하기 전인 지난 5월22일, 가상전에 대비해 예산 14억6천만 달러를 배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이버 테러가 21세기 국가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리노 미국 법무장관은 지난 2월 국회에서 예산 6천4백만 달러를 승인받아 국가 기간시설 방어 센터(NIPC·흔히 닙시라고 불린다)라는 새 기구를 만들었다. 닙시는 은행·운송망·전력·상수도원·군사 전산망을 비롯해 국가 주요 전략망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68쪽 상자 기사 참조).

미국 전산망은 전세계 해커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미국 대통령 대(對)테러 자문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적국·테러 조직·범죄 단체 들이 국가 중요 전산망에 체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 가상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국가 주요 전략 지역에 대한 폭격에 견줄 만한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전세계 어느 나라의 기간 시설이든 전쟁이 일어날 때 폭탄이 아니라 가상 공격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 국방부 웹사이트는 1주일에 평균 60차례나 해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 수치도 낮추어 잡은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국방부 전산망이 95년에만 25만 번에 걸쳐 가상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국방부 못지 않게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중앙정보국에도 해커가 자주 침입하고 있다. 나토 전투기들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하자 미국 중앙정보국 홈페이지에는 중앙바보국(Central Stupidity Agency)이라고 적힌 그림 파일이 떴다. 중국 해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영국 정보기관 MI6, 사이버 공격에 치명상

미국 국방부가 비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택한 정책은 시프넷(Secret Internet Protocol Routing Network). 시프넷은 인터넷과 자체 전산망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방부 내부 전산망에 접근할 수 있는 요원의 자격을 제한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이 정책마저 군사 비밀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 국방정보체계국(DISA) 리처드 해일 수석연구원은 “친한 동료라고 하더라도 5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우리의 국가 비밀을 보고 있다는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전산망 보안 전문가들은 미국 주요 전산망이 취약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보스턴에 본부가 있는 전산망 보안 전문 업체인 로프트(LOpht) 직원들은 “사이버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미국 주요 전산망의 보안 체계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 가상전 대응 체제 구축할 투자에 인색

한국의 국가정보원 격인 영국의 국가 정보기관 MI6는 사이버 공격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인터넷에 MI6 요원 명단이 떠 전세계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하는 비밀 요원의 신분이 노출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해 영국과 첩보전을 벌이고 있는 나라의 정보기관은 이 명단이 없어지기 전에 내려받기(다운로드)를 했다. 전세계 전산망의 1%밖에 차지하지 않는 중국도 가상전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대만이 올해 가상전 방어 체계를 서둘러 마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커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캐나다도 EWA-CANADA와 Can-CERT 같은 조직을 88년부터 만들어 가상전에 대비하고 있다.

한국 국방연구소 이남용 박사는 “우리나라도 가상전에 대비해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침투 방지를 비롯해 정보전 방어 체제는 구비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라고 말했다. 군사 부문이 갖춰야 할 가상전 대응 체제는 국방부 정보기획관실이 맡아서 연구하고 있다. 또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은 국가안전기획부·정보통신부·외교통상부가 분담해 추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내 정보전 전문가들은 연구 성과를 공유하거나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보보호센터나 국방연구소에 근무하는 가상전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개탄하고 우려하는 대목이 있다. 정부 고위층들이 가상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보전은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데도 예산을 심의하고 배정하는 고위 인사들이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21세기의 싸움터는 사이버 공간이며, 21세기의 최대 전력은 가상전 무기이다. 4대 가상전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이 가상전 무기와 방어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사건을 겪을 수도 있다. 전산 전문가들의 견해를 경청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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