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경쟁’에서 무릎 꿇은 항생제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9.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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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코마이신에 버티는 슈퍼 박테리아 출현…항생제 남용이 원인
삶과 죽음의 레이스. 의학이 병원균과 벌이는 투쟁을 일컫는 말이다. 인체에 염증을 일으켜 생명을 앗아가는 병원균을 없애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항생제를 만들었다. 항생제가 새로 나오면 병원균은 잠시 주춤했다가, 항생제의 공격에 견딜 수 있게끔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을 괴롭혔다. 그러면 인간은 더 강력한 효능을 가진 항생제를 개발했다.

이 치열한 전쟁에서 의학은 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병원균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어떠한 항생제에도 견딜 수 있는 병원균인 슈퍼 박테리아가 출현한 것이다. 지난 6월26일 서울중앙병원 임상병리과 배직현 교수가 임상미생물학회에서 발표한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당구균(VRSA)이 그것이다.

항생제에 전멸하던 병원균, 돌연변이로 맞서

97년 4월 배교수는 말기 직장암을 앓고 있는 40대 중반 환자의 골반에 염증이 생기자 항생제인 반코마이신과 타이코플라닌을 투여했다. 쉽게 염증을 치료하리라고 여겼으나 이 환자는 97년 말 숨지고 말았다. 배교수는 현대 의학이 만든 가장 강력한 항생제인 반코마이신에도 견딘 이 정체 불명의 병원균을 배양해 일본 도쿄에 있는 준텐도(順天堂) 대학병원에 보냈다.

이 병원의 히라마쓰 게이치(平松啓一) 교수는 이 병원균이 96년 준텐도 대학병원에서 검출된 적이 있는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당구균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병원균은 전세계에서 발견된 황색포도당구균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내성을 갖고 있었다.

지난 40년대까지 폐렴구균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류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항생제라는 기적의 약을 개발했다. 처음으로 사용된 항생제는 페니실린. 41년 페니실린이 폐렴구균 환자에 1만 단위 가량이 투여된 이후, 오늘날에는 하루 2천4백만 단위가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페니실린은 폐렴구균이 일으킨 폐수막염에 걸려 고생하는 많은 환자의 목숨을 구하며 항생제 혁명을 일으켰다.

페니실린으로 감염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의학의 오만을 비웃듯이, 병원균은 페니실린의 공격에 견디는 돌연변이를 만들었다. 페니실린을 아무리 많이 투여해도 살아남는 병원균이 나타나자 항생제 효능이 크게 떨어졌다. 현대 의학은 메티실린이라는 항생제를 만들어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메티실린도 오래 가지 못했다. 61년 메티실린 내성 박테리아(MRSA)가 출현한 것이다. 이 병원균은 60년대 영국을 강타한 뒤 스페인을 거쳐 동유럽·아시아·일본·미국까지 휩쓸었다.

인류는 가장 강력한 항생제인 반코마이신을 개발해 메티실린 내성 박테리아를 제압하려 했다. 반코마이신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했다. 사용도 늘어났다. 국내 반코마이신 생산액은 92년 41억원에서 97년 1백42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하지만 반코마이신까지 견디는 슈퍼 박테리아가 출현하면서 레이스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96년 일본 준텐도 대학병원에서 반코마이신을 투여해도 치료가 되지 않는 감염 환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 환자는 결국 치료약을 찾지 못하고 숨졌다. ‘항생제 남용 1위’ 한국은 내성 박테리아 천국

준텐도 대학병원 임상병리학 전문가들은 환자의 검체에서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당구균을 검출했다. 이 병원균은 일본에서 검출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재작년 4월 서울중앙병원에 출현해 국내 최초의 희생자를 만든 것이다.

슈퍼 박테리아는 항생제를 남용하는 나라에서 기승을 부릴 확률이 높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의 천국이다. 한국인은 감기만 걸려도 항생제를 구입해 복용한다. 의료보험연합회가 지난 3월 공개한‘97년 의료보험 진료 내역 조사’에 따르면, 국내 총진료비 가운데 약값이 32.5%를 차지했는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항생제 구입 비용이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외국의 항생제 구입 비용은 전체 치료약 구입비의 10% 가량이다.

한국의 항생제 의존도가 세계 최고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계에서 항생제에 내성을 갖춘 돌연변이가 나타날 확률은 수백만분의 1. 따라서 항생제를 남용하면 내성을 갖추지 못한 비돌연변이 세균은 죽일 수 있지만, 내성을 갖춘 돌연변이 병원균이 급속히 늘어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국내 병원의 대다수가 슈퍼 박테리아를 검출할 시설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지 않아서 보건 당국에 보고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슈퍼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얼마나 많은 환자가 숨졌는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발견되었다고 해도 이 사실을 숨겨야 할 형편이다. 백약이 무효인 전염성 병원균이 출몰하는 병원에 누가 입원하려 하겠는가.

이러한 국내 진료 환경은 슈퍼 박테리아가 더 빨리 퍼져나갈 환경을 제공한다. 설령 슈퍼 박테리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며 21세기 흑사병을 일으킬 채비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병원균과 벌이는 레이스에서 의학이 조금씩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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