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치훈, 대단한 조선진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9.07.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진 9단, 혼인보 쟁취… 일본 바둑 세대 교체 나팔수 될 듯
일본 3대 바둑 타이틀전 가운데 하나인 제 54기 혼인보(本因坊) 도전 7번기 제 6국이 열린 지난 7월6일 저녁 6시59분. 시즈오카 현 도이죠의 고급 여관에 차려진 대국실 옆에 대기하던 관계자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7번 대국의 귀신’이라 불리던 조치훈 9단(43)이 제한 시간 1분을 남겨놓고 “마잇다(졌다)”라며 바둑돌을 놓아 버린 것이다. 이 순간 54년 역사를 가진 혼인보 타이틀은 무명 기사에 가까운 조선진 9단(29) 품으로 넘어갔다.

꿈에 그리던 빅 타이틀을 거머쥔 조선진 9단의 몸가짐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혼인보 도전기가 열리는 동안 정장을 하고 대국실에 미리 들어가 바둑판을 닦아놓고 평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조치훈 9단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조선진, 조치훈에 반해 본격 바둑 수업

조치훈 9단이 장고에 들어가 머리를 긁거나 넥타이를 풀어 헤쳐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가 불리할수록 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반면(盤面)을 정시했다. 그것은 그가 조치훈 9단이 도일(渡日)한 지 18년 만에 24세 나이로 메이진(名人) 타이틀을 획득하고 훈장을 받기 위해 귀국한 모습을 보고 감동해 바둑 수업을 본격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진 9단은 그런 대스승 앞에서는 아무리 비정하게 승부를 가려야 하는 대국일지라도 예의를 지켰다.

그래서 그는 제 6국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승리를 확신한 후 기뻤느냐’는 질문에 모기 같은 목소리로 “음”이라고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 그쳤다. 그는 더 나아가 “왜 선생님이 실수를 범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라며 패자인 선생님을 감쌌다.

일본 기자들이 다시 조치훈 9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타이틀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선생님과 어깨를 마주한다는 것은 아직 상상도 못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진 9단은 광주 주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바둑을 시작했다. 그 후 제 2회 해태배 어린이대회를 제패할 만큼 두각을 나타내자 낙농업을 하던 아버지 조성규씨가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보냈다. 82년 원로 기사 안도 다케오(安藤武夫) 6단 문하생으로 들어간 12세 소년 조선진은 일본말이 서투르고 환경이 낯설어 고통을 받으면서도 도일 2년 만에 프로 기사 관문을 통과했다. 그 후 86년에는 유원배를, 91년에는 신인왕전을, 92년에는 신예 토너먼트전을 속속 제패했지만 이름 있는 대회에서는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리그에 오른 지 3년 만에 겨우 혼인보전 도전권을 획득했다. 첫해에는 리그에 겨우 잔류할 정도의 성적을 남긴 데 그쳤고, 두 번째 해에는 아예 탈락했다. 또 세 번째 해에는 3연승으로 호조를 보이다 2연패를 당해 4명이 벌이는 플레이 오프를 거쳐 도전권을 획득했다.

일본의 바둑 타이틀전은 가장 권위 있는 대회가 요미우리 신문사가 주최하는 기세이(棋聖)전이고 그 다음이 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하는 메이진전이며, 그 다음이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하는 혼인보 전이다. 그밖에 왕좌위·천원위 등을 합쳐 메이저 대회가 7개나 된다. 하지만 조선진 9단은 54기 혼인보전 도전권을 획득할 때까지 이름 있는 7개 타이틀전의 도전권을 한 번도 따지 못했다.조선진 9단보다 4년 늦게 일본에 간 류시훈 7단(28)은 8년 만에 일본기전 랭킹 6위인 천원위(天元位)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류시훈 7단은 또 96년 제 51기 혼인보전 도전권을 따 조치훈 9단과 맞선 적이 있다. 하지만 조치훈 9단이 도일 18년째인 24세에 메이진 타이틀을, 류시훈 7단이 도일 8년 만인 24세 때 천원위 타이틀을 획득했다고 해서 조선진 9단이 늦깎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번 대국에서 조치훈 9단이 이기리라는 예상이 압도적이었다. 대국 전만 해도 조치훈 9단이 혼인보 타이틀을 10기 연패하고 있었으며, 기세이전은 4기 연속, 메이진전은 3기 연속 승리해 이른바 ‘대3관’을 3년째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치훈 9단은 또 ‘7번 대국의 귀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곱 번씩 대국하는 타이틀전에서 90%에 가까운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7번 대국에서 조 9단을 이긴 기사가 4명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의 7번 대국 실력을 잘 입증한다.

이번 타이틀전에서 조선진 9단의 바둑은 대국을 거듭할수록 정교해 졌다. 조선진 9단은 제2국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이것으로 5국까지는 갈 수 있겠네요”라고 겸손해 했지만, 4국과 5국을 반집과 두 집 반으로 이긴 뒤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진 9단은 <마이니치 신분>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 6국을 앞두고 좋은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국장에 들어가서 마음을 가라앉혔다”라고 밝혔다. 이 날 흑을 든 조선진 9단은 첫 수를 화점에 놓고, 3수와 5수로 좌하귀를 소목과 날일자로 굳혀 세력과 실리를 꾀하는 포석을 펼쳤다.

이에 견주어 막판에 몰린 조치훈 9단은 중반에 잇달아 의문수 38수와 40수를 두었으며, 패색이 짙어지자 강수를 거듭 두며 승부를 걸었으나 우변 백 대마가 함몰되자 승부는 163수 만에 끝났다. 조치훈 9단은 대국이 끝난 뒤 일본 언론에 “음, 미숙했습니다”라고만 밝혔다.

일본기원 관계자들은 조선진 9단 기풍에 대해 ‘생명력이 길다’‘간단하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평한다. 그런 점에서는 ‘제한 시간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조치훈 9단 기풍과 닮아 있다.

조선진 9단은 사생활에서도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다. 조9단은 10년 수업을 끝내고 현재는 지바 현 우라야스 시에 있는 방 2개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취미는 최근 배운 골프이지만, 하루 종일 기보를 연구하는 성실파라고 한다. 성격도 모나지 않아 일본 바둑계에서 ‘산뜻한 청년’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조치훈 이후 일본 바둑 한국계가 이끈다

혼인보전에서 조치훈 9단을 꺾은 조선진 9단이 앞으로도 계속 그를 물리치고 일본 바둑계의 패권자로 뛰어오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치훈 9단은 혼인보 10연패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위대한 프로 기사이며, 아직도 기세이와 메이진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바둑계 서열 1위 기사이기 때문이다.

조치훈 9단이 패했다는 뉴스를 접한 일본 바둑계 관계자들도 그의 대진 일정이 너무 빡빡해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치훈 9단의 독무대’가 끝나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 젊다는 얘기이다.

반면 조선진 9단이 승리함으로써 일본 바둑계에도 세대 교체 바람이 거세게 일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 일본의 한 유명한 프로 기사는 자신이 신인에게 패해 타이틀을 잃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시대가 변하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라며 조선진 9단의 승리를 ‘세대 교체를 알리는 나팔’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바둑계에 세대 교체 바람이 분다 해도 ‘조치훈 이후’를 이어받을 사람들은 결국 한국계 기사들이다. 일본 기원에 소속된 프로 기사들은 현재 줄잡아 4백 명을 헤아린다. 그 중 외국인은 대략 30명 정도인데, 타이틀을 얻었거나 도전권을 획득한 외국인 기사는 류시훈 7단과 조선진 9단 정도이다. 조치훈 9단의 제자 출신으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김수준 4단(20)을 포함하면 20대 한국계 기사 3명이 또 다른 선풍을 몰고 올 것이 틀림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