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 의원 “외환 위기 규명, 순서가 틀렸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9.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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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누클 보고서’처럼 남덕우 전 총리 같은 경제 전문가에게 외환 위기 보고서를 만들도록 해, 그것을 바탕으로 청문회를 열어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법·제도를 검증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었
강경식 의원(전 경제 부총리)이 IMF환란조사특위의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지 이틀째인 지난 1월27일, 이 날 그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시민들로부터 많은 전화가 걸려 왔다. 강의원이 IMF 사태의 주범이라고 해서 정말 잘못한 줄 알았는데 청문회를 보니까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나름으로 애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등 격려성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일방적인 주장만 편 뒤 증인들을 질책하는 특위 위원들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강의원은 지난 1월30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청문회가 ‘침대에 다리 맞추는’ 식으로 진행되지 말고 본래의 취지대로 정책 청문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받은 느낌을 말씀해 주십시오.

청문회는 영어로 히어링(hearing)인 만큼 주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청문회 특위 위원들은 증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증언 내용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것은 다시 묻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번 청문회는 미리 결론을 내 놓고 몰아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고 대안을 찾는 청문회가 되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청문회 특위 위원들이 외환 위기의 원인을 규명하는 수준이 낮다는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외환 위기의 원인을 규명하는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태국 정부는 외환 위기로 인해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 전문가인 누클이라는 사람에게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누클이 여러 전문가와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포함한 각계 인사들을 인터뷰해서 만든 것이 지난해 5월에 나온‘누클 보고서’입니다. 그 후 태국 중앙 은행장이 외환 위기의 책임을 지고 문책당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보고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한국판 ‘누클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전문가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망받는 원로 경제 전문가는 아마도 남덕우 전 총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그 분에게 누클 보고서 같은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남덕우 보고서’가 나오면 국회가 이를 바탕으로 청문회를 열어 다시는 외환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는 게 좋은가를 검증하는 방식이 바람직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경제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감사원 감사로 누클 보고서를 대신해 저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을 형사 처벌부터 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특위 위원들은, 97년 초부터 외환 위기 징후가 나타났는데도 막지 못한 것은 실책이라고 주장하는데, 당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라 빚이 1천5백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에 외환 위기가 온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빚을 갚을 만큼 벌어야만 그같은 위기를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96년에 2백40억 달러 적자를 본 데다가 97년에는 적자가 1백20억 달러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적자가 난 만큼 빚은 더 늘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에서 돈을 더 빌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돈을 맡겨도 떼이지 않는다는 신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특위 위원들이, 당시 강경식 경제팀의 기아 사태 처리 지연이 대외 신용을 떨어뜨려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아의 부채는 12조 정도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빚의 10분의 1도 안되는 액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기아가 채권단에 책임을 지지 않고 대항하기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국내 은행들을 통해 기아에 돈을 빌려준 외국의 처지에서는 ‘돈을 빌린 놈이 더 큰 소리 치는’ 상황이 발생하자 한국을 못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기아가 대외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기아가 큰 소리 친 배경이 정치권과 시민 단체를 포함한 사회 전체가 기아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대외 신용 하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기아 사태로 인한 대외 신용 하락이 단기 외채의 만기 재연장이 전면 거부되는 외환 위기로까지 발전했다고 보십니까?

97년 10월 말부터 일본계 금융기관들이 우리 국내 금융기관들에 빌려준 단기 외채의 만기를 연장(roll-over)해 주지 않고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외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계 금융기관들의 이같은 단기 외채 회수가 우리나라의 대외 신용 하락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당시 일본계 금융기관들은 그 해 7월부터 통화 위기가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10월24일 홍콩 증시 폭락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실 채권을 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일본계 금융기관들은 서둘러 외국에 빌려 주었던 단기 외채를 회수하러 나섰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97년 11월 외환 위기를 겪게 된 것은 그 전까지의 신용 위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당시 경제 총수로서 일본계 금융기관들이 단기 외채 회수에 나설 것을 미리 알 방법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97년 11월7일 엄낙용 차관보를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나, 한국은행 이경식 총재가 직접 일본은행 마쓰시타 총재를 만나 일본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나 모두 우리 정부가 일본의 사정이 얼마나 다급한지 몰랐음을 반증합니다. 결산 시기가 3월과 9월인 일본계 금융기관들이 당시 단기 외채를 회수하리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

일본이 단기 외채 회수에 나서기 전인 10월27일까지의 신용 위기와 그 이후의 외환 위기가 서로 관련이 없다면 외환 위기가 경제 위기로 비화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단순한 외화 유동성 위기인 외채 위기가 오늘날 실물 경제 위기로까지 발전한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97년 11월16일부터 국제통화기금과 구제 금융 협상을 벌이고 있던 저와 김인호 수석이 사흘 뒤 전격 경질되면서 국제통화기금과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 후임자인 임창렬 부총리가 우리가 이미 진행하고 있던 구제 금융 협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11월19일 금융시장안정대책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국제통화기금 지원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해 우리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간의 신뢰가 결정적으로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부터 대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당하는 실물 위기가 그로 인한 부실 채권 누적에 따라 금융 위기로 발전했다가 다시 실물 위기로 변화한 것은, 우리 정부의 신용에 의심을 가진 국제통화기금이 문제가 있는 처방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청문회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저와 김인호씨가 잘못했다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 관련 개혁인 금융과 재벌 개혁을 우리 두 사람이 국제통화기금으로 가기 전에 추진했을 때 반대한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특히 현정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금융 개혁과 동일한 금융개혁법안을 97년 9월10일부터 저와 김인호씨가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했으나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가 반대하자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날치기 처리라는 오명을 듣지 않으려고 단독 처리를 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 두 사람 모두 오늘날 현정부가 하고 있는 구조 조정을 하려고 했으나 정치권의 반대로 못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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