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성 신한국당 상임고문 “확신 서면 승패 떠나 출마”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04.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권의 무서운‘대권 복병’으로 거론되는 이수성 고문. 요즘 그는 조용하다. 오전에는 멀리 한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한남동 집에서 머무를 때가 많고, 주로 오후에 움직인다. 그나마 장애인 행사 참석 같은 비정치적인 활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정가에서는 그를‘YS의 숨긴 카드’나‘민주계의 대안’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가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몇 마디 한 것을 두고 정치권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당내 다수파인 민주계에 마땅한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친화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그의 주가는 갈수록 상종가를 치닫고 있다.

이고문은 몇 차례 거절한 끝에 4월4,5일 이틀에 걸쳐 자택에서 회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일단 말문을 열자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민유방본(民唯邦本)’을 되풀이 강조하면서 현 정국에 대한 견해를 솔직하게 말하고, 대권 도전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이제 이고문께서는 본인이 아무리 부인해도 여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거취에 대해 언제쯤 결단을 내릴 생각입니까?

시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누가 이 나라를 위해 가장 적합한 사람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권 문제를 단순히 정치 기술 측면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아요.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닌가요?

지금처럼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계속되고 어느 누구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때, 당내 여러 주자 가운데 제가 가장 낫다는 확신이 서면 승패에 상관 없이 출마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확신이 서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누가 진정으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국민을 사랑할 사람이냐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얼치기 세계주의자나 대권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배제해야 합니다.

이고문에게 달리 선택할 여지가 있습니까?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사실 저 혼자만 생각한다면 당을 떠나 고고한 체 선비처럼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일단 결단을 내리게 되면 제 모든 힘을 다해 민족의 자부심을 지키고 국민이 정치·경제나 도덕적으로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 정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진정으로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사람, 국민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그러면서 이고문은 기자에게 현재 여권에서 그런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억지 쇼맨 십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가 (다른 주자들보다) 가장 낫겠지요.

현정권의 개혁이 오늘날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혁 자체는 옳았는데 너무 급격하고 과도한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옳다고 해서 너무 서두르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에 차근차근 추진했어야 하는데.

현철씨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대통령은 금권과 관권을 차단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아들이 뭐가 아쉬워 그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현철씨 자신도 문제가 있지만 그를 둘러싼 세력, 즉 개혁이 주춤한 틈을 타서 먹이를 찾으려고 덤벼든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았다고 봅니다. 검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진실이 밝혀지겠지요. 혐의가 드러나면 당연히 법대로 처리해야 하고.

대권 주자들이 잇달아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세몰이에 들어갔습니다. 이고문께서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실 계획입니까?

세몰이는 무슨…. 그런 데 관심 없습니다. 머지 않아 여의도에 사무실을 낼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면, 날씨가 좋은 5월 중순쯤 비원이나 창경궁에서 장애인과 어려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겠어요.

지난주 대구에 내려간 것을 TK의 상징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사를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무서운 사람’이니‘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는 대구에 내려갈 때 기자들에게 제발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대권에 도전하게 되면 대구에서 하지 않습니다. 대구는 제 고향이자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곳일 뿐입니다.

다른 지방을 방문할 계획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어디든지 갈 생각입니다. 곧 광주에도 내려갈 예정입니다.최근 이고문께서‘민주계의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고, 민주계 껴안기에 나섰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는데.

뭐, 껴안고 말고 할 이유가 있나요. 세 불리기를 할 생각도 없는데. 행사장에서 민주계 중진 의원을 우연히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갖고 만난 적은 없습니다.

만약 민주계가 이고문에게 연대나 추대를 제의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상황을 보아서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판단되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벌써부터 민주계를 끌어안는다거나 반(反)이회창 대열에 선다든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회창 대표나 다른 주자들의 최근 대권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남을 일절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너무도 잘 알지만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개인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정인에게 기울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다른 주자들과 합종연횡을 시도할 생각은 없습니까?

저는 옳은 길이라면 혼자서도 외롭게 걸어왔습니다. 정치 기술적인 측면에서 인위적으로 다른 사람과 손잡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라면 함께 같은 길을 갈 수는 있겠지요.

민주계 일각에서는 활로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내각제 개헌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만.

사람이 문제지 제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국민을 위해 헌신하면 되는 것이지, 현재의 대통령중심제를 인위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남북이 대치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홍구 고문이 주장하는 권력분점론은 어떻습니까? 일각에서는 대통령·총리 역할 분담론도 나오고 있는데.

현대 국가가 등장한 이후 정치에서 제도나 운영 체제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됐습니다. 제도를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총리가 상당한 권한을 갖는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이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집행하게 됩니다. 이회창 대표의‘강한 리더십’과 이홍구 고문의‘화합적 리더십’중 어느 쪽이 다음 정권에서 더 필요할까요?

둘 다입니다. 다양한 집단과 의견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끝없는 포용력을 갖춰야 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상당수가 반대하더라도 강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 역시 필요합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그저 사람만 좋다면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강하면 독선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지요. 양자는 반드시 병행해야 합니다.

대구를 방문했을 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비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론적인 법이론을 갖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찬반 양론이 있는 줄 압니다. 어쨌든 법의 근본 이념은 정의보다 사랑입니다.

이고문의 친화력을 계산된 행동이라고 보는 비판적인 시각도 일부 있습니다만.

제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두고 패거리 정치 어쩌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의도를 갖고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사람을 좋아했고, 지금도 코흘리개 어린이나 장애인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아주고 싶어집니다.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대통령이 후계 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김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심이라는 것이 따로 있나요. 누가 민족적 자부심을 지키고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가를 판단해서 그 사람에게 대통령이 호의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유불리와는 관계 없이 어느 대통령이라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이고문을 각별히 신임하는 이유가 뭡니까? 두 사람 간에 대권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요?

정말이지 저는 총리 직을 완강하게 사양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대통령이 믿고 총리 직을 맡긴 데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건 상관 없습니다. ‘오야붕’과 ‘꼬붕’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군신 관계라고나 할까요.

이고문의 선친을 두고‘월북이냐 납북이냐’말이 많습니다. 이 문제가 이고문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성을 높이며) 그건 저와 제 어머니 그리고 납북자 가족과 6·25 때 전사한 모든 분들에 대한 모독이자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정치가 아무리 험하다고 하지만 그런 비열한 모략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심장이 불편하신 상태에서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는데, 아마 끌려가시다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추정됩니다만. 북한에서 무슨 혁명열사묘소에 묻혔다느니 고위직을 지냈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제3국을 통해서라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겠습니까.

한 살이라도 아래면 동생, 한 살이라도 위면 금방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건 좀 잘못 알려졌어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아무에게나 그럴 수 있나요. 드문 경우지만, 싫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깍듯이 존대말을 씁니다(이고문은 인터뷰 도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상대방을‘형님’이라고 불렀다).

이고문의 여성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이고문 집안은 대대로 전통적인 예법을 매우 중시하는 보수적인 가풍으로 유명하다).

여자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에 반대합니다. 요즘 여성들이 그런 쪽을 좋아하는 것이야 할 수 없지요. 그것은 보수적이라기보다 하나의 전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또한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자 영원한 진리입니다.


총리 공관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짐 정리가 채 끝나지 않은 응접실 한쪽에는 <쉰들러 리스트> <대통령의 연인> 같은 비디오 테이프가 보였다. 이고문은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남이 나를 배신할지언정 결코 남을 배신하지 않는’유비 같은 인생을 살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현관까지 나와 기자를 배웅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