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PD’가 몰려온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7.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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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프리랜서 활동 활발…영세성·소재의 한계·완성도 문제 해결이 관건
정축년 새해를 누구보다 가슴 설레며 맞은 사람이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 프리랜서 임완호씨(33)가 그 사람이다. 임씨가 반달곰 흔적을 쫓기 위해 두 달간 지리산 8백리 산자락 곳곳을 뒤지고 다니던 시간들이 끝나고, 남은 것은 필름을 편집하고, 관련 자료를 끌어모아 재구성하는 작업뿐이다. 오는 2월2일 KBS <일요 스페셜>은 이 필름을 <반달곰이 살고 있는 땅, 지리산>(가칭)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할 예정이다.

임씨의 작업이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작품 자체의 가치 때문이다. 지리산에 반달곰이 생존하는지는 지난해 전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사였다. 대통령이 ‘지리산 반달곰 살리기’ 특별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였다. 임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반달곰이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들을 보여준다. 나무를 발톱으로 할퀸 자국, 반달곰이 높은 나무 위에 즐겨 만든다는 의자(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모양새이다), 배설물 따위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눈 위에 찍힌 곰의 발자국. 이 발자국은 찍힌 지 며칠 안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임씨의 작업에는 큰 의미가 있다.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제작 프리랜서, 이른바 ‘다큐 프리랜서’가 국내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영국 BBC,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랜서를 동원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방송사들이 시간과 자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강점을 높이 산 결과이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치우치는 경향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다큐 프리랜서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생소하다. 굳이 따지자면 국내의 다큐 프리랜서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방송사에서 PD(프로듀서)로 일하다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한 1세대 프리랜서들이다. 정수웅(‘다큐멘터리 서울’ 대표)·이동석(‘리스프로’ 대표)·김태영(‘인디컴’ 대표) 씨 등이 여기 속한다.

다른 하나는 방송사 바깥에서 개인 또는 소집단 형태로 자생한 부류이다. 그러나 비방송인 출신 다큐 프리랜서들이 방송사의 관문을 뚫기란 쉽지 않다. 방송사에서 정식으로 다큐멘터리 수업을 받고 방송사와 이런저런 끈이 닿아 있는 PD 출신 프리랜서와는 여건이 또 다르다. KBS TV1국 장윤택 주간은 “자기가 찍은 필름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수십 명이지만 채택되는 작품은 1년에 서너 편이다”라고 말한다. 그나마 고정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 외부 프리랜서에게 문호를 넓게 개방하는 편이라는 KBS가 이 정도이다.

임완호씨도 처음에는 자기 작품을 들고 ‘무작정’ 방송사로 찾아갔다. 그것이 KBS <일요 스페셜> 제작진 눈에 들어 전파를 타게 된 것이다. 임씨의 첫 작품 <느티나무 둥지 100일의 기록>(95년 10월13일 방영)이 좋은 반응을 얻자 KBS는 임씨와 정식 계약을 맺고 새 작품을 의뢰했다. 그것이 <반달곰 …>이다.

이전에도 공중파 방송을 통해 작품을 선보인 프리랜서는 몇 명 있었다. 시베리아에 사는 한국 호랑이를 국내 최초로 화면에 담은 임순남씨(42)가 대표적인 예이다. 임씨는 <추적, 한국 호랑이> 외에도 <북한산의 사계> <딸란섬> 등을 KBS와 SBS를 통해 선보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단발성 계약에 그치고 말았다. 방송사 제작진은 △작품 완결성이 떨어지고 △소재가 치우쳐 있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SBS 시사교양국 신언훈 부장은, 프리랜서들이 만들어 온 작품을 그대로 내보내는 경우는 단 한 편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KBS 장윤택 주간 또한 프리랜서들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재의 치우침은 프리랜서의 양적 성장을 가로막는 더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한 PD는 프리랜서들이 자연 다큐멘터리 쪽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방송 속성상 정치 비판적이거나 너무 앞서가는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방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재의 제약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한계에서도 말미암는다. 장윤택 주간은 “같은 소재라도 차별화한 시각과 방식으로 접근한 작품이라면 언제라도 환영한다”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새들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이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임완호씨의 첫 작품 <느티나무 둥지…>의 경우 이들의 종족 보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둥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환경 문제에까지 연결한 시각의 참신함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바깥 여건으로 보자면 다큐 프리랜서들의 미래는 밝다. 케이블 TV에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이 생겨나는 등 수요는 날로 늘고 공급은 달리기 때문이다. KBS의 경우 올해 안에 우수한 다큐 프리랜서 4∼5명으로 팀을 구성해 ‘자체 제작·외주 제작·해외물 수입’의 편성 비율을 2 대 1 대 1로 안정시켜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장비도 프리랜서들의 부담을 덜고 있다. 임순남씨의 경우 3년 전 베타 카메라·내시경 카메라·8㎜ 비디오 카메라 등 기본적인 장비를 마련하는 데만 1억원 가량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2백50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 6㎜ 디지털 카메라가 급속히 대중화하고 있다. KBS 김현 PD는 과거 8㎜ 카메라와 달리 6㎜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화면은 그대로 방송으로 내보내도 될 만큼 화조 (해상도)가 좋다고 설명한다. 방송사의 ‘헐값 후려치기’에 전전긍긍

그렇다고 프리랜서들이 ‘장밋빛 미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작품 값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현실이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선(先) 계약 후(後) 제작’과 ‘선 제작 후 계약’ 사이에서 방황한다. 선 계약을 택하면 방송사의 장비와 제작 노하우를 제공받을 수 있지만 방송사의 간섭이 불가피해지고 프리랜서의 독립성이 침해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프리랜서들이 선 계약을 선호하는 데는 생계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생계를 위해 따로 부업을 하고 있다는 임순남씨는, 방송사에서 받은 작품 값으로는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프리랜서들은 작품당 평균 천만 ∼1천5백만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SBS 신언훈 부장은 방송사 내부 규정에 따라 제작 기간·감가상각비 등을 고려해 작품비를 산정 지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KBS 장윤택 주간 또한 내부 기준에 따르되 작품의 질을 따져 플러스 알파를 덧붙이기도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여름 방영한 <극한 도전-걸어서 북극해를 건너다>의 경우 이를 제작한 허영호 탐험 팀에 7천만원을 지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방송국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ㅂ씨는 “공력을 많이 들인, 상당히 뛰어난 작품인데도 거기 합당하지 못한 액수가 지급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라며, 이같은 규정이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3D 다큐멘터리를 ‘헐값으로’ 사기 위한 편법으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경계했다.

제작비 때문에 다큐 프리랜서들이 허덕이는 현실에서 문승욱씨(30)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폴란드 체재 유학생이자 제1회 서울 다큐멘터리 영상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이기도 한 문씨는, 오는 3월 케이블TV 다큐멘터리 전문 Q채널을 통해 <더 마스터>라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Q채널이 외부 프리랜서 작품을 방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10여 년을 외국에서 방랑하다 폴란드에 정착한 한 한국인 태권도 사범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Q채널과 폴란드 영화 산하 국립기록영화제작소가 55 대 45 비율로 제작비를 댄다. 폴란드 영화부는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제작비를 신청하면 전문 심사위원이 1년에 몇 개 작품을 선정해, 제작비 가운데 일정액을 지원하는 ‘파케팅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사적인 자본으로부터 예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다. 국가가 뒷받침할 때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다큐 프리랜서들의 입지도 탄탄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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