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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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상부상조 사회 꿈꾸며 ‘외길’ 5년… 과학 지상주의 경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책”(법정 스님) “세상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 준 고마운 책”(영화 평론가 이효인) “작으면서도 엄청난 충격을 주는 책”(영남대 이동순 교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발행 부수 6천에 불과한, 쟁쟁한 필자들을 동원한 것도 아닌, 월간지도 아닌 격월간지가 이런 찬사를 연거푸 받았다면 오히려 과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녹색평론>에 대한 ‘고무·찬양’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10월 출판 전문지 <출판저널>은 당대를 대표할 지식인 46명의 추천을 받아 ‘현대의 교양 고전’ 1백52권을 선정했다. <녹색평론>이 거기 당당하게 끼어 있었다. 잡지로서는 유일했다.

지난달 발행한 11·12월호(통권 제31호)로 <녹색평론>은 창간 5주년을 맞았다. 5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이만큼 자리를 굳힌 잡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교수(영남대·영문학)는 지인들 사이에서 ‘고집스런 원칙주의자’로 통한다. 대구의 <녹색평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 고집스런 원칙주의자는 원고를 쓰고 있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나오는 그에게서 쑥뜸 냄새가 났다. ‘김선생님 건강이 좋지 않다’고 직원이 귀띔했다. 그래서였을까. 창간 5주년을 맞는 소감을 김종철 교수는 ‘좀 지쳤다’고 밝혔다. 처음 2∼3년은 ‘불에 덴 듯’ 오직 <녹색평론>만을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 기가 많이 쇠잔해졌음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허튼 환경운동 통렬히 비판

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많은 것을 ‘희생’했다. 후원자나 후원단체 없이 시작한 만큼, 책을 찍어내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직원 월급을 주는 데 드는 돈은 상당 부분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문학 평론가로서의 활동도 일단 접어두어야 했다. 문학 평론 분야에서 70, 80년대에 빛나는 성과를 남긴 그가 <녹색평론>을 시작한 이래로는 단 한 편의 글도 발표하지 못했다. <녹색평론>에 실을 국내외 자료를 추리고 번역하는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기 때문이다. 처음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 청탁과 교열·교정·편집의 전과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가 지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원칙주의자가 원칙적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더욱이 그 세상을 바로잡고자 나서야 하는 버거움을 빳빳하고도 예민한 그의 ‘시적 감수성’은 견뎌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딜레마’라고 표현했다.

책을 내는 행위부터가 그랬다. ‘묵시록적 상황에 임박해 있는,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오늘날의 위기’ 앞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비슷한 심정을 느끼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며 책을 낸다는 대의 명분과 ‘범람하는 인쇄물 공해 시대에 또 하나의 공해를 추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항상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모순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창간 때부터 꾸준히 재생지를 써 왔다. 책 표지에 코팅도 하지 않는다. 격월간 <녹색평론>뿐 아니라 여기서 출판하는 단행본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컬러 인쇄는 아예 불가능하고 흑백 사진도 잘 표현되지 않는 투박한 종이. 이를 받아 본 서울의 한 대형 서점이 ‘왜 파본을 보냈느냐’고 항의한 일도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종이에서부터 <녹색평론>의 정신을 읽는다. “왠지 약해 보인다. 고결한 정신은 쉬 상처 입는다던가. 달력 종이로 곱게 싼다. 책 표지를 싸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라는 한만수 교수(순천대)의 헌사는 독자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또 하나의 딜레마는 김종철 교수 자신의 문제였다.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대안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하는 사회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 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해 온 당사자가 ‘그놈의 밥줄 때문에’ 17년째 몸담아 온 대학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그의 밥줄은 <녹색평론>의 비상시 밥줄이기도 하다. 정기 구독자가 4천 명을 넘어섰다지만 그 중 책만 받아 보고 돈을 내지 않는 이가 절반에 가깝기 때문이다.

김종철 교수가 고백하는 이런 딜레마는 비판자들에게 좋은 공격 무기가 된다. 어떤 이들은 <녹색평론>을 ‘지식인의 자기 위안에 봉사하는, 무해(無害)한 잡지’라고 비판한다. 현실의 권력에는 어떤 위협도 주지 못한다는 비아냥이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 독자 대부분은 지식인이 아니라 농민, 중고등학교 교사, 시골 보건소 직원처럼 소박하게 살면서도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해 좌절하고 있던 사람들이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진정한 혁명이란 이들이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물질 문명의 본질을 깨달아 ‘우주적 전체로서의 일부’인 자기를 돌아보고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을 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원칙’을 얘기하면서 그는 작금의 환경운동을 강하게 비판한다. 자기가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 피상적인 현실만 따지는 환경운동은 결국 체제 존속에 이바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환경 단체가 기업 협찬을 받아 행사를 기획하고 기관지에 자동차 광고를 싣는 행위를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던 환경 단체 지도자가 한 제지업체로부터 잡지 용지를 무료로 제공받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렸던 기억도 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대학 사회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그러나 호된 비판은 그가 지식인에 대한 기대를 꺾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기술 연구자에 대한 기대는 더하다. 토양 오염·온실 효과·오존층 고갈·사막화 같은 문제를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을 그는 ‘근거 없는 미신’이라는 말로 일축해 왔다. 과학사를 통해 볼 때 과학은 진리에 대해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나라에는 눈 먼 독지가도 없는가

그러나 매듭을 지은 자가 풀 수도 있는 법이다. 때문에 그는 가는 곳마다 <공업 사회의 붕괴>(1987년)를 쓴 쓰치다 다카시 같은 ‘개종자(改宗者)’가 한국 사회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쓰치다는 일본 교토 대학 교수이자 명망 있는 금속물리학자였다. 오일 쇼크 이후 현대 문명이 얼마나 허망한 기반에 서 있나, 자기가 하는 연구가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나를 깨닫고 교수 직을 그만두었다는 쓰치다는, 몸소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환경 운동을 펼치고 있다.

<녹색평론>의 ‘세례’를 받아 농촌에서 공동체를 일궈 보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 김교수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단 의지만 갖고는 귀농(歸農)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땅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턱없이 비싼 땅값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최근 혼잣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 나라에는 눈먼 독지가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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