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무기 '백신'을 잡어라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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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유행하면 속수무책…이제는 자급자족 나설 때
토마토를 붉게 만드는 리코펜은 여러 모로 인체에 유익하다. 노화를 느리게 하고 피부 탄력에 도움을 주는가 하면, 암과 동맥경화를 예방한다. 최근에는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토마토가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아주는 백신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국 코넬 대학 톰슨 연구소는 수년간 식용 식물에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백신을 찾아왔다. 이 연구소는 토마토에 한 단백질의 생성을 자극하는 인공 유전자를 주입해 보았다. 이 단백질은 위염과 설사의 원인인 노워크 바이러스를 막아주는 물질이었다. 그 결과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 토마토를 냉동 건조해 분말로 만들어 실험쥐에게 먹였더니, 노워크 바이러스에 면역 반응을 보인 것이다. 톰슨 연구소는 이에 용기를 얻어 요즘 노워크 바이러스와 대장균의 독성을 제어하는 감자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뉴스위크> 한국판 특별호⑦).

식품을 매개로 한 이같은 백신이 개발된다면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전통적 백신처럼 냉동할 필요가 없는 데다, 세계 각국에 씨앗으로 값싸게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분명한 한계도 갖고 있다. 식물에서 채취한 백신이 위를 거쳐 혈액에까지 간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어느 정도를 섭취해야 면역 효과를 나타내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기술로 더 빠르고 더 안전하게 듣는 백신 개발을 서두르고 있지만, 한국의 백신 개발 현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식품의약품안전청 박종필씨(생물의약품과)는 현재 한국이 개발하는 백신은 “B형 간염 백신과 일본뇌염 백신 두 가지뿐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인플루엔자 백신과 소아마비 백신도 생산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국산 백신은 하나도 없다. 원료를 수입해 와서 증류수나 약품을 섞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과 H5N1 바이러스로 인한 조류 독감이 아시아를 휩쓸면서, 이제부터라도 백신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올해에는 대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한 전문가는 “미생물은 치사하지 않아서 항상 미리 경고한 뒤 사람을 공격한다. 지금 동남아에서 벌어지는 재앙이 그 경고일지 모른다. 백신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중국 교수(충북대 종양연구소장)는 “백신은 석유나 식량보다 더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얻어다 쓰는 데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상자 기사 참조). 만약 조류 독감이 인체에서 인체로 감염되어, 1918년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처럼 유행한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 백신이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수요가 늘어나면 주요 생산국인 유럽 몇몇 나라와 미국이 자국민에게 우선 접종한 다음에야 다른 나라에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은 2001년에 인플루엔자 백신을 필요한 양의 40%밖에 공급받지 못했다.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미국이 인플루엔자 접종 연령을 65세 이상에서 50세 이상으로 낮춘 탓이었다. 이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일본은 오래 전부터 모든 백신을 자급자족하고 있다. 인플루엔자 백신은 전세계 9개 제약사에서 한 해 약 2억8천만 도즈(1dose=1회 투여량)를 생산한다.

김우주 교수(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는 “그러나 백신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유전공학이 발달해 백신 기술이 진일보했지만, 한국 제약사의 돈과 기술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또 백신 개발은 모험이 많이 따르는 사업이다. 개발 기간이 아무리 짧아도 5년 이상 걸리는 데다, 전염병이 유행하기 전에는 소비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녹십자백신 김경호 이사(개발실장)는 “제조 방법만 찾아내면 3개월 안에 백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고 효능을 검증하는 작업이 몇 배 더 험난하다”라고 말했다. 가령 조류 독감 백신을 개발할 경우 H5N1 바이러스의 변이를 모두 예측해야 하고, 제품을 만든 뒤 복잡한 임상·생체 실험을 거쳐야 한다. 또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하는 50여 조건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제시하는 100여 조건을 통과해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

소문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는 웬만한 백신이 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중국산 백신이 단 한 가지도 없는 이유는 국제 규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상황이 다국적 제약사 중심의 백신 프로그램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식품의약국을 쥐락펴락하면서 자사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다른 나라의 백신 개발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일부 약삭빠른 국가들은 이미 세계보건기구의 ‘감시’를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전 일이다. 뉴욕 9·11 테러 여파로 ‘두창(천연두) 테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세계에 번졌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백신 개발에 필요한 두창균을 비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구입 방식은 공개 입찰이었다. 관계자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두창균이 박멸되고, 그 즈음에 세계보건기구가 균주를 파기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유럽의 여러 제약사가 두창균을 팔겠다고 앞다투어 나선 것이다. 한 관계자가 ‘균주를 다 파기했을 텐데 어디에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유럽 제약사의 한 간부가 비웃듯 말했다. “미국이 없애란다고 없애는 바보 같은 짓을 안한 덕분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일본도 이미 3백만 도즈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같은 세계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신 개발은 현재 다국적 제약사 글락소와 아베티스 파스퇴르(유럽), 그리고 와이어스와 머크(미국)가 85%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 제약사들은 정보·기술·자금에서 상대가 안된다. 한국의 제약사 모두를 합쳐도 다국적 제약사 한 곳만도 못하다는 것이 김경호 이사의 평가이다. 설사 백신 개발에 나서더라도 다국적 기업의 ‘견제’를 피할 수 없다. 과거 녹십자가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했을 때, 한 다국적 제약사는 ‘싹’을 도려내려고 가격 덤핑이라는 공격을 감행했다(그런 역경을 딛고, B형 간염 백신은 현재 한 해에 6백억∼7백억 원어치가 수출된다).

전염병이 창궐하던 1960∼1970년대만 해도 한국에는 놀랍게도 백신 회사가 30여 곳이나 있었다. 비록 부작용과 소비 저하로 속속 문을 닫고 말았지만, 한때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제 그런 영광은 옛 추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국내에서는 영영 백신 개발이 불가능할까. 전문가들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외국계 백신 회사의 공장을 유치해 국내에서 생산토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 차원에서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백신 전문가들과 보건 당국자들의 인식 차이는 커 보인다. 질병관리본부의 한 관리는 정부가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백신 연구소에 자금을 대고 있어 “인플루엔자 백신 등 여러 백신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별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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