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세대 사로잡자” 신문들 대변신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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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쓰기·섹션화 바람…기사 중심에서 경영·전략 중심으로 이동
신문사마다 ‘화장 고치기’가 한창이다. 올 가을 독자들은 ‘지면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라는 신문 사고(社告)를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가로쓰기와 섹션화 확대이다. <서울신문>과 <문화일보>는 각각 지난 10월1일과 10월30일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이에 앞서 <매일경제신문> 또한 ‘경제 신문의 대중화’를 선언하며 9월16일 전면 가로쓰기로 돌아섰다.

‘한글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 ‘일제 구태(舊態)의 상징’ 등 온갖 비난을 들으면서도 백 년 가까이 견고하게 세로쓰기를 고집해 온 신문업계로서는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들의 시도는 1년 전 <중앙일보>의 ‘선구적인 모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그 전에 여러 스포츠 신문과 당시 <한겨레신문>이 전면 가로쓰기를 시행·정착해 가고 있었지만 매체의 특수한 성격상 이들은 잠시 접어둔다).

섹션화 바람도 거세다. 10월14일 <한겨레신문>은 <한겨레>로 제호를 바꾸고 지면을 24면에서 28면으로 늘리는 한편 ‘한겨레 창’이라는 고정 섹션을 설치했다. <한겨레>의 설명에 따르면 ‘한겨레 창’은 요일 별로 주제를 선정해 집중 보도하는 테마 기획이다. 이어 <한국일보>도 지난 4일부터 대대적인 지면 혁신과 함께 야심찬 섹션 ‘네오’ 시리즈를 선보였다. 네오클래식(종합 문화 정보)·네오포커스(시사 심층 취재물)·네오라이프(생활 정보) 세 부문으로 구성된 이 섹션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시사·생활 정보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네오’로 정했다고 한다.

이같은 시도에 대한 반응은 두 갈래이다. 우선 가로쓰기의 경우 ‘때늦은 감은 있지만 두 손 들어 환영한다’(허 웅 한글학회 이사장)는 반응과 ‘가로쓰기 지면에는 힘이 통 실리지 않는다’(<조선일보> 관계자)는 반응이 엇갈린다. <한국일보>는 ‘가로쓰기 지면 확대’ 쪽으로 우회 전략을 택했다. 이 신문 뉴스토피아 기획본부 정승호 부장은 ‘세로쓰기에 익숙한 기존 독자들의 충격을 고려해 점진적인 개혁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네오 시리즈 등 바뀐 지면에 대한 반응을 보고 전면 가로쓰기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섹션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겨레 창’이나 ‘네오’ 시리즈는 예외없이 파격적인 사진 배치와 디자인으로 ‘신문 속의 잡지’를 연상케 한다. 소재 선택 또한 과감하다. ‘한겨레 창’은 유기염소 대재앙·‘묻지마’의 사회심리학·과로사 등 기존 편집 틀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웠던 소재를 집중 취재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일보>의 경우 최근 외설 논쟁으로 시끄러운 장정일의 작품 세계로 ‘네오’ 시리즈 첫장을 연 이래 특수 부대 심층 취재 등으로 초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독자적 색깔 못내는 섹션화는 문제”

섹션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은 있다. 한 언론학자는 ‘섹션화가 세계적인 대세라는 데 공감한다. 오히려 문제는 독자적인 색깔을 내지 못하는 섹션화이다’라고 지적한다. 이들 지면이 지난해 등장해 대중적 인기를 끄는 데 성공한 <중앙일보>의 경제·스포츠 섹션이나 <경향신문>의 ‘매거진 X’ 섹션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켠에서는 이들 섹션을 ‘매거진 Y’라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들린다. ‘한겨레 창’ 팀의 한 기자는 이에 대해 소재로 승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심층 취재를 얼마나 구현하느냐가 독자성을 확보하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시도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변화의 조짐이다. 이재현 교수(충남대·신문방송학)는 이를 ‘신문의 인식 체계가 바뀌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한국 신문이 ‘기사 중심 시대’에서 ‘경영과 전략 중심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밖으로는 독자 제일주의를 앞세운 지면 혁신, 안으로는 신문사 체질 개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경기 하락에 따라 광고 시장이 위축되면서 체질 개선은 신문사마다 절체절명의 요구로 떠오르고 있다(44쪽 딸린 기사 참조).

신문사들이 ‘살아 남기’의 첫번째 전략으로 설정한 과제는 미래의 젊은 독자층을 사로잡는 일인 듯하다. 10월1일 <서울신문>의 사고(社告)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신문은 ‘단순한 대세론’ 때문에 전면 가로쓰기를 시도하려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근거를 들었다. 한글 전용 세대가 신문의 주요 독자층으로 떠올랐다는 것이 그 첫번째이다. ‘1948년 한글 전용법이 공포된 후 교육 받은 한글 세대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58.3%로, 신문 주독자층(15∼64세)의 84.1%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를 겨냥해 성공한 섹션으로 평가받는 <경향신문>의 ‘매거진 X’를 신문사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때문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신문을 위한 신문’ 더 이상 안 통한다

‘네오’ 섹션을 위해 <한국일보>는 정치·사회·문화부 기자 20여 명을 투입해 특별취재 1팀과 2팀이라는 전담 팀을 새로 만들었다. <한겨레> 또한 부국장 관할 아래 각 부서에 소속된 기자 40여 명으로 ‘한겨레 창’ 팀을 따로 꾸렸다. 팀제와 부서제가 혼합된 형태이다. <한국일보>의 경우 디자인 일부는 외부에 맡기고 있다. 이 모두가 독자의 입맛에 맞는 지면을 꾸미려는 노력이다. ‘당분간 가로쓰기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조선일보>도 매주 토요일 수도권 독자를 대상으로 ‘굿모닝 디지틀’이라는 정보통신 섹션을 발행하고 있다. 전면 가로쓰기를 시험하고 정보화 세대 독자층을 유인하기 위해서이다.

조병량 교수(한양대·광고홍보학)는 ‘이제 신문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다가왔다’고 진단한다. 기자 중심의 ‘신문을 위한 신문’, 취재원을 의식하고 쓰는 기사로는 더 이상 소구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잇단 지면 개선은 마케팅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전조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문사도 살아남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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