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카드` 받은 축구 대표팀 새 유니폼
  • 박은수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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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강국 유니폼 디자인하며 한국 끼워넣기…태극의 상징성도 반영 안돼
지난 3월3일 상암 월드컵경기장. 중국과의 올림픽 예선전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은 1 대 0 승리를 이끌어내며 아테네를 향한 첫발을 순조롭게 내디뎠다. 이 날 여러 매체가 ‘새 유니폼과 기분 좋은 인연을 맺었다’고 전했지만, 사실 새 유니폼의 출생은 그다지 축복받지 못했다.

90분 동안 그라운드를 지배하라는 뜻을 담아 ‘토털(Total) 90’이라고 명명된 새 유니폼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2월23일. 나이키가 2002 월드컵 이후 2년 동안 고심해서 만들었다는 이 야심작은 디자인과 기능 면에서 예전 유니폼과 많이 다르다. 이음새 부분을 박음질이 아닌 접착식으로 제작해, 상의 무게를 185g에서 155g으로 줄였다. 목 칼라 부분을 없애 솔기 때문에 피부가 쓸리는 것을 방지했다. 또 열과 수분은 밖으로 배출하고 바깥 공기는 안쪽으로 흐르게 해 쾌적함을 유지하는 쿨 모션 기능도 더해졌다. 발표 당일 유니폼을 입어본 선수들은 “가벼워서 좋다”(조병국), “바람도 잘 들어오고 편하다”(김영광) 등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기능성으로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새 유니폼은 네티즌으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문제는 디자인. 상하의 색상은 그대로 유지한 채, 앞가슴 번호를 동그라미 안에 넣고 뒷면 이름 부분을 배색 처리한 새 디자인에 대해 쏟아진 네티즌들의 평가는 가혹할 정도였다. 특히 앞면 동그라미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로또공 같다” “버스 번호판이냐” “안정환이 입으면 19세 미만 관람 금지냐” 등의 비아냥이 대한축구협회와 각 축구 관련 사이트 게시판을 채웠다.

당황한 축구협회는 2월24일 일단 가슴의 동그라미를 없앨 수 있는지 나이키와 협의 중이라고 발표했다. 25일에는 중국전에서 기존 유니폼을 착용하겠다고 말했다. 26일에는 제작사인 나이키에 디자인 변경을 요청했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축구 팬이 원하지 않는 옷을 입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축구협회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실전에서 한번 착용해 본 후 판단하자는 나이키의 견해에 조용히 굴복해, 한국 대표팀은 예정대로 새 유니폼을 입고 중국전을 치렀다.
나이키는 1997년부터 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디자인해 공급해온 공식 스폰서이다. 나이키가 자기들이 후원하는 8개국에 공통적인 디자인과 기능을 채택해 제공한 이번 유니폼은 미국·브라질·네덜란드 팀에 먼저 공급되었고, 지난 2월18∼19일 전세계 A매치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새 유니폼은 나이키 유럽 본사와 미국의 글로벌 본사가 공동으로 연구 개발하고, 지난해 유벤투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명문 클럽에서 검증을 거쳤다. 피구나 카를로스 같은 유명 선수들이 직접 착용하고 성능을 시험하기도 했다. 이 야심작이 유독 한국에서만 화살을 맞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들의 혹평과 디자인 변경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보기 나름이다” “처음이어서 낯설 뿐 익숙해지면 괜찮다” “유니폼이 대수냐, 경기를 잘해야지”라는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패셔너블한 유니폼을 보고 개안(開眼)을 경험한 축구팬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지난 월드컵 때 얕은 눈속임 반칙을 일삼던 이탈리아팀 토티의 몸에 딱 달라붙는 ‘쫄티 유니폼’만큼은 디자인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분명 멋져 보였다. 구찌의 최고 디자이너 가운데 한 사람인 닐 바렛이 제작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은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 유행 아이템이 되어 있다. 마니아 수준의 축구 팬들은 이제 나이키보다는 아디다스가 공급하는 일본이나 프랑스 유니폼이 더 세련되었다고 평가하는 수준이 되었다.

사전에 한국 언론이나 축구 팬의 의견을 듣지 않은 나이키는 축구 강대국의 유니폼을 디자인하며 한국을 끼워넣기한 듯하다. 또, 동그라미에 든 번호를 가슴에 새긴 여덟 국가대표팀들은 한결같이 나이키의 깃발 아래 뭉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른쪽 가슴에 너무 크게 박힌 나이키 로고 역시 자사의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나 민족성을 배제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축구만큼 국가주의와 민족성이 강한 스포츠도 없다. 그래서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국기에서 모티브를 따온다. 브라질팀의 노란색, 프랑스의 파란색, 미국의 흰색 유니폼은 모두 해당 국가의 국기와 연관된 것이다. 한국 대표팀의 붉은색 상의와 청색 바지는 태극기의 태극 색상에서 차용한 것이다. 한국 대표팀은 1948년 런던올림픽 때부터 이 유니폼을 입었다. 반 세기 넘게 붉은전사의 전통과 이미지를 만들어온 한국의 유니폼은 그러나 지난 월드컵 때부터 바뀌었다. 당시에도 나이키가 제작한 대표팀 유니폼은 컬러가 예전보다 밝았다. 나이키는 다른 팀과 차별화하는 동시에 선수들의 몸집을 커보이게 하기 위해 붉은색은 명도를 높이고 하의는 채도를 낮추어 상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핫 레드와 데님 블루라고 칭해진 이 색상들은 사실 빨강과 파랑이 아니라 분홍색과 청회색이다. 행정자치부가 고시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나와 있는 태극의 적색·청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음양의 조화와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태극의 상징성에 글로벌 기업이 생각 없이 물타기를 한 것이다. 현재 대표팀 유니폼에서는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유일하고도 멋지도다”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던 태극기의 미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축구 전문 사이트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새 유니폼에 대한 축구팬들의 선호도는 20%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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