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r)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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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구 회장(59)은 한국 자동차산업의 산 증인이다. 1976년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부터 시작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한국 차는 거의 없다. 1969년 입사해 2002년 초 연구개발 담당 사장을 끝으로 현대
현대차, 독자 기술 개발해 성공…기초 과학 기반 약해 초일류 못돼

자동차 엔지니어에게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으며,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0.000001의 에러율에도 우주선이 폭발했다. 확실히 알기 전에는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공학도의 바른 자세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경쟁이 치열한 탓이다. 현대는 선진국 완성차 업체들이 단단히 진용을 짠 시장에 뒤늦게 들어갔다. 이만큼 따라잡은 것도 불가사의한 일인지 모른다. 1998년 EF 소나타로 궤도에 올랐는 데, 불과 20여 년 걸렸다.

이제 자동차산업 발달사를 살펴보자. 바퀴(wheel)가 문명의 이기로 처음 사용된 것은 BC 3200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다. 동력을 사용한 세계 최초 자동차는 1789년 니콜라 퀴뇨의 증기 자동차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자동차는 1901년 메르세데스가 개발했다.

1908년 포드가 T모델을 시작으로 대중화를 열었고, 1914년 이동식 조립 공정을 개발하면서 세계자동차 산업은 대량 생산을 위한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1920년대 들어 자동차 모델이 다양화하기 시작했지만 시장에서 경쟁이 본격화한 시기는 1950년대였다. 대형차를 통해 빅 마진을 추구하는 미국의 빅3(GM·포드·크라이슬러)와 전쟁의 폐해를 딛고 경제적인 국민차 개발에 몰두한 유럽의 피아트·폴크스바겐(비틀)이 경합했다. 한국에서도 1955년 최초 조립 자동차인 ‘시발’이 나왔다.

1974년 현대가 한국 최초로 고유 모델인 포니 개발에 착수했다.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처음부터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달려든 것은 우리가 처음이어서 비웃음을 샀다. 이탈리아의 이탈디자인에서 디자인을 했고 엔진은 새턴, 플랫폼(엔진과 트랜스 미션, 서스펜션 같은 차의 골조)은 포드 콘디나 것을 썼지만, 2년이 못가 한국은 고유 모델을 갖게 되었다. 1982년 포니Ⅱ에 이어 1983년에 나온 스텔라 역시 절반은 우리 기술이었다. 1985년의 포니 엑셀과 1986년의 그랜저도 플랫폼은 미쓰비시 것이었지만, 디자인은 현대가 자체 개발했다. 제휴선인 미쓰비시의 플랫폼은 결함이 많아 이것을 고치느라 ‘구들장’부터 건드려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현대의 실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는 일본차가 대공세를 벌인 시기였다. 혼다 시빅과 도요타 카롤라를 앞세운 일본차들이 미국과 유럽 시장을 질주했다. 1987년 포니 엑셀을 미국 시장에 들여보내면서 한국도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무려 27만대를 팔았으니 엄청난 성공이었고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고난은 바로 이 때문에 시작되었다. 품질이 크게 떨어진다는 악평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련이 현대를 성장시켰다. 무슨 수를 쓰든 결함을 줄여야 한다, 독자적인 기술을 축적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했던 것이다. 현대는 1990년대 들어 마침내 기술 자립을 선언했다. 엔진 및 트랜스미션 국산화에 돌입한 것이다. 1994년 국산 엔진을 장착한 엑센트가 출시되었고, 1998년 완전 독자 플랫폼인 아반떼가 시장에 나왔다. 현대의 가장 고급 차종인 에쿠스는 벤츠 S클라스와 BMW 750에 대항해 내놓은 차다. 이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차라고 자평한다.
28년간 총 30개 모델을 개발했다고 하면 어떤 모델에 가장 애착을 느끼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다 내 자식이어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포니는 첫 고유 모델이고 포니 엑셀은 미국 시장 관문을 처음 뚫었으며 후륜 구동에서 전륜 구동으로 바뀐 첫 차다. 아반떼도 빼놓을 수 없다. 100% 현대가 만든 첫 차는 엑센트이지만, 아반떼는 업그레이드된 차다. EF 소나타 역시 현대에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1992년 뉴그랜저와 1993년 소나타Ⅱ, 1995년 티뷰론에 이어 1998년 EF 소나타를 시장에 내보낼 때 후배들에게 그랬다. ‘현대는 미쓰비시를 추월했다. 도요타·혼다와는 어렵지만 이제 닛산과는 맞먹어보자.’ 미국 차들과도 겨누어봄직했다. EF 소나타는 시장에서 성공했다. 이 차가 성공함으로써 현대는 비로소 자동차의 전모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시장의 요구를 파악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개발자로서 현대가 성공한 비결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고유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독자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는 점이다. 최고경영자는 과감한 연구 개발 투자에 사운을 걸었다. 마케터들은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세계 시장을 뛰어다녔다. 정말 ‘틈만 나면’ 수출했다. 세계 자동차의 시험장이라는 미국에 수출하는 나라는 독일·일본·한국밖에 없다. 여기에 선대 회장(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캔두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살길이 그것밖에 없었고, 문제가 생기면 풀어야만 했다. 회의할 틈도 없었다.

물론 아직도 현대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미국 시장에서 가격 대비 품질로 볼 때 미국차보다 현대차가 더 낫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아직은 세계 최고 대열에 들지 못한다. 세계적인 자동차 평가 기관인 J.D 파워의 2003년 글로벌 톱 30 자료에 따르면, 현대 차들은 30위에 끼지 못했다. 베르나(49위)와 아반떼(51위) 산타페(56위) 쏘나타(59위)가 60위권에 들었을 뿐이다.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는 무서운 경쟁자들이다. 독일 폴크스바겐과 BMW·벤츠는 여전히 강력한 브랜드 경쟁력을 갖고 있다. 특히 폴크스바겐은 플랫폼당 생산대수가 80만대나 된다. 현대는 올해 말 15만대(현재 13만대)가 될 것이다.

현대가 리더 그룹에 들기 위해서는 기초 기술 개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현대·기아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과제다. 자동차가 종합적인 경쟁력을 가지려면 부품 2만 개의 수준이 균질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기초 과학 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한국차가 독일이나 일본차보다 못한 것에는 첫 강의(3월5일) 때 얘기한 국민성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과 일본 사람은 잔혹할 정도로 차갑다. 차가워야 정확해진다. 반면 한국인은 너무 뜨겁다.

겪어보니 엔지니어링은 예술과 가장 가까운 것 같다. 누구를 위한 것이냐가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둘 다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적 행위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절대 미각’이라는 말이 나오던데, 자동차 개발도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지를 요구한다. 기기로 잴 수 있는 모든 것을 시험하지만, 이 차를 시장에 내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최종 결정할 때는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감을 발달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직장 선배로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명예는 상사에게, 사랑은 부하에게, 책임은 자신에게! 이런 생각을 실천하면 순항할 수 있다. 열심히 들어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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