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만에 만난 중국의 은인 가족
  • 북경·李興煥 특파원 ()
  • 승인 199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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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로 김 구를 비롯한 상해 임시 정부 지도부 일행은 상해를 빠져나와 도피했다. 일경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는 중국 인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임시 정부 일행은 절강성 가흥(嘉興)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일행 중에는 김의영(金毅渶), 정정화(鄭靖和) 부부의 아들 자동(滋東·당시 5세)군도 끼어 있었다. 김 구 일행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중국인은 절강성장을 지낸 저보성씨였는데, 은신처인 수륜사창에서 김 구 일행을 맞이한 사람 가운데에는 저보성의 손자 계원(啓元·당시 9세)군도 끼어 있었다.

역사의 한 장면에 등장했던 그때의 어린 주인들이 64년이 흐른 다음 ‘그때 그곳에서’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상해 임시 정부를 지원한 공로로 저보성씨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였다. 지난 9월30일, 절강성 가흥시 가흥빈관에서 거행된 독립장 수여식장에서는 48년 타계한 저씨를 대신해 훈장을 받은 저계원씨(73·왼쪽에서 두번째)와 그 자리에 참석한 김자동씨(69·맨 왼쪽)가 64년 전 아슬아슬했던 가흥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김씨는 광복 후 상해 임시 정부 일행을 따라 귀국해 언론계에 잠시 몸담았다가 저술가로 활동했다. 저계원씨는 중국 정부에서 외교계에 투신해 주 프랑스·영국·노르웨이 대사를 지내다, 89년 짐바브웨 대사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후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 부총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이사인 부인 서군패(徐君佩·왼쪽에서 세번째)씨와 북경 시내 전직 외교관 거주지인 동교민항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자동씨는 지난 10월, 중국 청도에 중한합작사인 해명기계유한공사를 설립해 대표 이사로 일하고 있는 둘째딸 선현(善顯·38·맨 오른쪽)씨와 함께 북경을 방문한 기회에 저씨 부부와 자리를 함께하고 중국인 노부부에게 맏딸을 인사시켰다. 조부모와 부모가 2대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고초를 겪은 중국 땅에서 사업을 일으킨 선현씨는 “조부모가 남겨주신 흑백 사진에서만 본 중국인 은인의 후예를 직접 만나 너무 기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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