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클리닉]바쁜 생활에 쉼표를 자주 찍자
  • 정혜신(정신과 전문의·‘마음과 마음’ 원장) ()
  • 승인 1997.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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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자도록 만들어졌는데도 잠이라는 여백을 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인생에서 휴식과 정리의 여백이 없으면 ‘인생의 지진아’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으면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넌다고 한다. 이승에서의 온갖 슬픔과 분노와 즐거움 따위 미련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망각을 잘하는 40대 초반이며 대기업 중견 간부인 그는 매우 괴롭다. 며칠 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 물통은 밖에 놔두고 손에 들었던 핸드폰을 냉장고에 넣고 하루 종일 찾았다. 물건 찾느라 허비하는 시간이 실제 일하는 시간보다 많아질 지경이 되자 무슨 심각한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치매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고 병원을 찾았다.

젊은 사람이 치매가 되는 경우는 교통 사고나 뇌출혈, 알콜 중독 등으로 인한 뇌손상이 있을 때 생기는 2차적인 치매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뇌손상이 없는 젊은 사람에게 생기는 건망증은 99%가 신경쇠약 증상이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의 얘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 하나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도 없고. 그렇지만 아이들 결혼할 때까지는 뒷바라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한 10여 년이 지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내가 죽어도 별 상관이 없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13년 동안 영업 부문에서 근무했습니다. 내가 매출을 5억, 10억 더한댔자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우리 회사 물건을 파는 것이 사회 공익에 도움이 됩니까? 우리 회사가 공급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상품을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건가요? 다른 회사에도 똑같은 물건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위에 있는 이사님이 자리를 1년 더 버티는 데는 도움이 되겠죠. 그것말고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13년이나 해온 내 자신에게 비애를 느낍니다.”

무가치감은 그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었고, 그 결과 그의 일상 생활에서는 건망증을 비롯한 사소한 실수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항우울제 투여와 더불어 상담 치료를 하다가 나는 그에게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을 가져보라고 제안했다. 그는 휴가를 내고 전에 없던 파격적인 행동을 몇 가지 해보았다. 불현듯 해변을 끼고 달리는 기차 여행도 하고, 시골에서만 평생을 사신 큰누이의 집에서 며칠 소일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나’를 직면하는 기회를 만들자는 의도였다.

우리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자도록 만들어졌는데도 활동을 하는 낮의 가치는 크게 인정하지만 잠이라는 여백은 덜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더 많은 활동을 위해서는 수면 시간을 줄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도 타당한 것인지 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수면은 렘(REM) 수면과 논렘(Non-REM) 수면으로 나누는데, 논렘 수면이 근육 회복 기능을 하는 반면에 램 수면은 뇌의 소모된 기능을 회복시킨다.

잠자는 동안 낮의 학습과 경험 완성

수면의 중요한 기능 중에 인지 기능이라는 것이 있다. 낮에 받아들인 많은 정보와 경험 들이 뇌에서 재정리되고 기억되고 재학습되는 등의 정보 처리 과정이 바로 수면 중에 일어난다. 그래서 램 수면 중 단백질 합성이 증가하는 것은 학습된 정보를 기억으로 저장하는 뇌의 한 과정임이 증명되었다. 만일 밤 새워 공부하고 잠을 충분히 자지 않는다면 공부한 것이 뇌에서 정리되고 저장되는 과정이 방해받는다. 결국 낮의 경험과 학습은 수면을 통해서 완성된다.

인생에서도 활동만 있고 휴식과 정리의 여백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밤 새워 공부하고도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인생의 지진아’일 수밖에 없다. 상담을 마칠 때쯤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람은 꿈꾼 만큼 사는 것이다’라면서.

남미의 한 나라를 탐험하던 문명인이 그곳 원주민을 고용하여 짐을 날랐다고 한다. 높은 산을 한참 올라가고 있었는데 짐을 진 원주민들이 갑자기 더 가지 않고 멈추었다. 탐험가는 그들을 재촉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를 내기도 하고, 위협해 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몇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은 천천히 다시 짐을 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탐험가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 서 있었나?’ 원주민이 대답하기를 ‘쉬지 않고 걸어서 우리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혼을 기다렸다’고.
삶의 여백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다. 영혼을 기다리지 않고 쉼표 없이 앞으로만 가다 보면 몸의 건강도 영혼도 우리를 떠나 레테의 강을 건널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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