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農共生 농두레운동 펼치는 천규석씨
  • 경남 창녕·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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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서 농민·도시인 함께하는 농장 운영
 
‘도시 없는 농촌은 있어도 농촌 없는 도시는 없다’. 농민 출신으로 평생을 농민운동에 투신해온 천규석씨(58)의 슬로건이다. 90년부터 대구 한살림(회장 성삼경 영남대 교수)과 더불어 도농공생(都農共生) 농두레 공동체를 기획해온 천씨는 최근 그 설계도의 1단계를 실현했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 수개리에 공생 농두레 농장을 마련하고, 첫 수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천규석씨의 농민운동은 땅에서 출발해 마침내 땅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그의 농민운동은, 농업을 파괴한 산업 문명의 폐해를 극복한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 대안의 문화운동이다. 공생 농두레는 그래서 도시와의 연관, 즉 도시인의 자발적 참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식한다. 현재 농민만으로는 농촌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첫 파종을 한 남지읍 수개리 공생 농두레 농장은 8천평 규모. 벼를 비롯해 양파·수수·깨 등이 영글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농장 주인은 천규석씨가 아니다. 대구 한살림 회원을 중심으로 대구 인근 농촌 지역과 서울 사람들 2백10세대가 참여했다. 땅값과 시설비를 합해 모두 1억5천만원이 들었다. “이 땅을 구하게 된 우여곡절을 다 말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란다”라고 천씨는 말했다.

수개리 두레농장은 그가 지나온 생애의 결집이고, 앞으로 남은 생애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천규석씨는 두레농장 설립을 자신의 삶에 대한 중간 평가로 여기는 듯했다. 최근 그가 펴낸 <땅 사랑 당신 사랑>(명경)에 도농공생 농두레운동에 대한 심경이 진솔하게 담겨 있거니와, 그의 생은 ‘임’을 기다리는 일로 일관했다. 그 임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이기도 하고, 도농공생 농두레의 미래이기도 하다.

격월간 <녹색평론> 독자들은 천규석씨의 사색과 그 실천을 잘 알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민중문화운동의 전위들 또한 천규석씨의 그 칼칼한 성격에 익숙하다(그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2대 공동 의장을 지냈다). 그의 농두레운동은, 다른 문화운동과 달리 땅에서 출발한다. 이른바 문화운동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입만 살아 있는 건달’들에게 그는 우선 농사부터 배우라고 삽과 낫을 쥐어준다. 활농(活農)이 즉 활인(活人)이라는 믿음을 육화하라는 부탁이다.
천규석씨는 유기농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이자, 농촌이 붕괴되는 전과정을 농민의 처지에서 겪어온 농민운동 1세대이다. 영산줄다리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농가 주부가 절실했던 그의 부친은 농고 2학년이던 장남 규석을 결혼시켰다. 아버지는 오로지 농사를 위해 며느리를 들인 것이다.

문학 소년에서 갑자기 성인으로 탈바꿈한 그는 자기에게 얹힌 책임과 의무를 견디기 어려웠다. 농업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가출했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는 단신 상경해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갔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4·19 직후, 그는 거리로 나가 데모대에 섞였다.

 
두레는 가장 탁월한 문화예술 조직


서라벌예대를 졸업하면서 시인의 꿈도 포기했다. 평론가나 교수가 되고 싶어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학문의 길이 그렇게 순결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농촌이 새로운 운동의 현장이라고 판단하고 귀향했다. 홀로 집안 살림을 떠맡고 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65년, 그는 고향에서 농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79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88년 자녀들이 있는 대구로 이주할 때까지 그는 농사와 농민운동, 민주화운동과 민중문화운동의 맨 앞에 서 있었다. 70년대 초반 고향에서 가까운 부곡이 온천으로 개발되는 전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땅에 들이닥친 ‘개발’의 파괴성을 목도했다. 모든 개발은 삶의 근본인 농업을 파괴했고 농민들의 인격을 파탄시켰다.

80년대를 관통하던 여러 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그는 고향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 논농사에서 율무 농사에 이르기까지 안 지어 본 농사가 없었다. 이 때 유기농법을 시도했는데 ‘유기농은 욕망을 축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산업화 물결에 휩쓸려나간 두레를 현대적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청년 시절부터 품어온 꿈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두레는 매우 효율적인 공동 노동 조직이다. 그러나 천규석씨는 두레에서 더 많은 사실을 발견했다. 두레는 마을 자치 의회였고, 또 집행 기관이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탁월한 문화예술 조직’이었다. 그는 이 두레의 현대화, 즉 도농공생 농두레를 통해 공업 자본에 지배되고 있는 농촌과 시장 논리에 예속된 농업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농업 해방은 도시 해방이고 인간 해방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농업적 삶은 곧 자연의 순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생태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진정한 진보는 귀농이다. 도시 생활의 반인간성을 자각한 젊은이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다린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보기에 도시는 농촌에 기생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존속할 수 없다. 그런데 도시는 농촌을 기세등등하게 파괴하고 있다. 도농공생 농두레운동은 농촌을 무너뜨린 ‘원수’를 감싸안는 커다란, 그래서 본질적인 문화운동이다. 천규석씨는 이 문명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이 문명의 다음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래 사회의 주체는 그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 계층이면서 현실적으로는 최고의 소외 계층이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소외 계층이 바로 농민이다. 창녕 수개리 도농공생 농두레 농장에서 지금 미래로 가는 새로운 길 하나가 열리고 있다. 그 길은 ‘최소한의 생명을 소비하면서 자기 생명을 극대화하는 공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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