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자 골프 호령하는 한국 아버지들
  • 이종달 (goodday 골프 전문 기자) ()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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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박지은 등 한국 낭자들,‘바짓바람’ 덕에 골프 여왕 등극
한국 여자 골퍼들이 미국 그린의 안방을 차지하고 앉았다.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안방마님 행세를 하는 한국 낭자는 20여 명. 나라 별로는 미국에 이어 최대 규모다.

하지만 미국 선수들은 들러리일 뿐이다. 골프 여왕 박세리(27·CJ)를 비롯해, 박지은(25·나이키골프) 김미현(27·KTF) 한희원(26·휠라코리아) 박희정(24·CJ) 강수연(28·아스트라) 안시현(20·코오롱엘로드) 송아리(18·빈폴골프) 이정연(25·한국타이어) 장 정(24) 김 영(24·신세계) 등의 그늘에 가려 미국 선수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천재 소녀 미셸 위(14)까지 가세하자 한국 낭자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태세다. 올 시즌 들어 LPGA투어도 한국 여자 골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LPGA투어가 한국인 직원을 채용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시의 대상이었던 한국 여자 골프가 질시의 대상으로 성장했는가 했는데 어느 새 부러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수들이 한결같이 한국 골프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한다. 박세리가 미국 무대를 밟은 지 불과 7년 만이다. 이 짧은 기간에 한국 여자 골프가 미국 그린을 정복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한마디로 ‘바짓바람’이다. 한국 여자 골프의 성공은 선수들을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하는 부모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한때 한국 부모들은 미국 선수들에게 꼴불견으로 비쳤다. 마치 하인같이 선수들을 따라 다니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한국 부모들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사람같이 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부모들이 어찌 그런 것에 눈 한번 깜짝하겠는가. 딸자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했다. 그야말로 헌신적이었다. 운전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시집살이보다 더한 고생이었다. 이들의 고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몸으로 때우는 허드렛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들은 ‘눈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어를 할 줄도, 들을 수도 없었다. 머리가 희끗한 나이에 이국 생활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부모들의 가장 큰 고생은 경기 관전이라고 한다. 딸자식이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걱정이다. 성적이 좋으면 우승할 수 있을까, 저러다 삐끗하지 않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단다. 골프라는 경기가 마지막 홀에서 장갑을 벗기 전에는 누구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성적이 부진하면 마치 자기 탓인 양 딸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딸의 투정까지 받아주어야 한다. 딸의 눈치를 살펴 가며 뒷바라지해야 하는 것이 미국 그린을 정복한 한국 낭자 부모들의 현주소다.

그래도 성적을 잘 내는 딸을 둔 부모들의 마음 고생은 덜한 편이다. 돈 걱정 안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말한다. 툭하면 예선에서 탈락하는 선수들의 부모는 한 투어라도 더 돌기 위해 한푼을 아껴야 한다. 호텔 잠은 꿈도 못 꾼다. 자동차 안에서 토막잠 자기가 일쑤다.

이것은 약과다. 올 시즌 LPGA투어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부모들도 자연히 늘어났다. 한국 부모들끼리 갈등의 조짐이 나타난 것도 이 즈음이다. 다행히 큰 물의 없이 지내고 있지만,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라고 지적한다.

김미현·박정희 부모 ‘곱빼기 고생’

부모들의 딸 사랑 과잉은 LPGA투어에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지난해 LPGA투어 타이 보타 커미셔너는 한국 선수들과 부모들을 불러 경기 중 대화 금지 등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한국 선수들이 워낙 잘하니까 겪는 일이다. LPGA측은 한국 선수들이 경기 중 부모와 대화하면서 부정 행위를 하고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 그린의 바짓바람 원조는 박세리의 부모인 박준철씨와 김정숙씨. 1998년 미국 진출 당시 계약사인 삼성이 코치에 로드매니저까지 두었는데도 박준철·김정숙 씨는 박세리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박세리도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기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들의 치맛바람과 바짓바람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박세리는 3년 전부터 혼자 힘으로 투어 생활을 하고 있다.

박지은의 아버지 박수남씨도 딸의 ‘그림자 수행’에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박지은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동행했으니까 이 부문 최고참이다. 박수남씨는 딸이 워낙 어려서부터 ‘미국 물’을 먹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딸을 따라 다녀 여타 부모들과는 좀 달랐다. 박수남씨도 2년 전 딸을 ‘독립’시키고 간간이 중요 대회가 있을 때만 미국으로 건너가 응원한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고생을 ‘곱빼기’로 한 사람은 김미현과 박희정 부모다. 김미현이 미국에 진출하자마자 부모는 ‘밴’부터 샀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대회 장소마다 밴으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달리다가 졸리면 멈추고 차 안에서 자고, 배고프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 지긋지긋한 고생은 김미현의 성적이 오르면서 바로 청산했다.

그러나 박희정의 부모는 지금도 ‘밴 인생’을 계속하고 있다. 박희정은 비행기를 태워 다음 대회 장소로 보내고 자신들은 한국의 갤로퍼만도 못한 중고 밴에 의지한 채 몇날 며칠이고 다음 대회 장소로 달린다.

‘밴 가족’ 박희정은 CJ39쇼핑과 스폰서 계약(5년 19억5천만원)을 맺어 형편이 확 폈다. 박희정의 부친 박승철씨가 지금도 ‘애마’인 밴을 버리지 않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은, 딸이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투어에서 열심히 뛰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박희정이 LPGA투어에서 첫승을 했을 때 기자가 국제 전화를 하자 박승철씨는 “빨리 짐을 꾸려 밴을 몰고 다음 개최지로 이동해야 한다”라며 갈 길부터 재촉했다. 그러기를 벌써 5년째다. 박승철씨는 이제 이력이 나 힘든 줄도 모른다. 딸이 잘하고 있으니 오히려 힘이 난다고 한다.

한국 선수들이 미국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이면에는 이렇게 부모들의 피눈물 나는 뒷바라지가 있었다. LPGA투어와 외국 선수들은 문화적 차이가 만들어낸 이 값진 성공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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