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컴퓨터 교육 ''빛 좋은 개살구''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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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교과서 오류 투성이…보급 기종은 단종된 XT·AT
중학교 국정 컴퓨터 교과서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처음 문제가 된 것은 내용상 틀린 부분들이었다. 이를테면 △도스 외부 명령어를 보여 주는 화면에 ARJ.EXE, NDD.EXE, LHA.EXE, V3.COM 등 유틸리티나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점(36쪽),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로 방향으로 나누어진 칸을 열(row), 세로 방향으로 나누어진 칸을 행(column)이라고 한다’고 ‘열’과 ‘행’을 바꾸어 설명한 점(86쪽), △파일명으로 쓸 수 있는 문자에 와일드 카드인 ‘쪵’도 들어간다고 잘못 설명한 점(47쪽)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컴퓨터를 한 달만 배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오류이다.

문제가 확산되자 교육부는 지난 3월24일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정오표를 만들어 전국 일선 학교에 배포하겠다”고 급히 발표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컴퓨터 교과서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 것이다. 내용상의 몇 가지 오류는 편집의 실수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학생들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국정 교과서에서 오류는 ‘하나’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교과서가 ‘미래를 대비한 교육’이라는 컴퓨터 교육 본래의 목표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난데없이 중학교 컴퓨터 교과서에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컴퓨터’ 교과가 올해 처음 채택된 정규 과목이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제6차 교육 과정에 따라 전국의 중학교는 컴퓨터·한문·환경 세 과목 중 하나를 선택해 34∼68시간 교육하도록 되어 있다.

컴퓨터 교과서를 받아 본 일선 교사들과 학생들의 반응은 ‘철 지난 베이식은 왜 자꾸 나오는 거냐’ ‘PC통신에 관한 내용이 너무 적다’ ‘책 전체에서 구닥다리 냄새가 난다’ 등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과 편집을 질책하는 것이 많았다.
PC통신 실습 불가능

이에 대해 컴퓨터 교과서 연구·집필 과정에 참여했던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이상적인 시각으로만 재단하지 말아 달라. 나름의 노하우를 가진 최고의 인력이 모여 만든 책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 교육 현실에 맞춰 교과 과정을 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그가 말하는 교육 현실이란 중학교에 보급돼 있는 컴퓨터 현황을 의미한다. 중학교에 보급된 컴퓨터가 92년 국내 생산이 중단돼 버린 88XT와 286AT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해 국회 교육위 감사에서 지적된 바 있다.

하드 디스크가 달려 있지 않은 컴퓨터에서 어떻게 고용량의 고급 프로그램을 띄울 것이며, 모뎀도 없는데 어떻게 PC통신을 실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교육 현실을 감안할 때 교과서 집필 관계자들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해서 교과서에 완전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육부는 93∼94년에 걸쳐 컴퓨터 교과서를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컴퓨터 환경에서 교과서가 배포되기 2년 전에 이미 교과서의 대체적인 윤곽이 짜여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례로 문제의 교과서에는 요즘 일상 용어가 되다시피 한 ‘인터네트’ ‘멀티 미디어’ 같은 낱말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한국 교과서 제도의 고질적인 병폐 때문이다. 컴퓨터 교과서 같은 1종(국정) 교과서는 철저하게 교육부의 중앙 통제를 받게 되어 있다.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겠지만 급변하는 현실을 특히나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컴퓨터 교과서가 이러한 틀에 묶여 유연성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컴퓨터 교과서가 2종(검정) 또는 인정 도서로 전환돼 출판사들 간의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뒤떨어진 교육 시설과 융통성 없이 꽉 막힌 교과서 편수 제도의 만남. 컴퓨터 교과서의 오류는 애초에 여기서부터 배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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