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들의 슬럼프 탈출 비법.
  • 김형준 (메이저 리그 전문가) ()
  • 승인 2004.05.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아그라 먹고 ‘안타’머리 박박 밀고 ‘쾌투’
한국 야구가 배출한 두 거포 이승엽(28·지바 롯데)과 최희섭(25·플로리다 마린스)이 힘겨운 5월을 지나고 있다. 사이좋게 이틀 연속 홈런으로 5월을 힘차게 열었던 이들은 이후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지며 2군행과 벤치 신세라는 쓴맛을 보았다.

슬럼프는 대체로 심리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투구 폼이나 타격 폼이 흐트러지는 기술적인 요인 역시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승엽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은 한국 야구 최고의 타자, 아시아 홈런 기록 보유자라는 부담감이다. 반면 최희섭은 아직 주전 경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여유가 없을수록 한번의 실패가 무겁게 느껴진다. 이런 실패가 반복되면서 결국 슬럼프에 빠지는 것이다.

선동렬 “슬럼프에는 훈련이 보약”

한때 메이저 리그 최고의 왼손 투수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릭 앤키엘은 팀의 리그 우승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서 폭투를 9개 기록하고 나서 뚜렷한 이유 없이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에 걸렸다. 공을 던지기도 전에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갖게 된 앤키엘은 이후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어 다시는 메이저 리그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최근 메이저 리그에서 심리치료사가 각광받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심리치료사는 투수코치나 타격코치와의 일대일 훈련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매니 라미레스(보스턴 레드삭스 외야수)의 ‘펜스 공포증’, 월트 와이스(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루수)의 ‘악송구 공포증’을 고쳐준 것도 모두 코치가 아니라 심리치료사들이었다. 올 시즌 팀을 옮긴 후 극심한 초반 슬럼프를 겪었던 최고 연봉 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 3루수) 역시 심리치료사와 상담한 직후 부진에서 벗어났다. 한술 더 떠 로드리게스는 심리학 전공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평소 요가와 명상을 즐기는 배리 지토(26·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투수)는 자기 자신이 심리치료사다. 지토는 투구 폼이 흐트러질 때마다 공을 잡는 대신 어니스트 홈스의 <창조적 사고>를 반복해서 읽는다.

박찬호(31·텍사스 레인저스) 역시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하비 도프먼 박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겨울 LG 트윈스가 처음으로 해외 전지 훈련에 심리치료사를 동행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감독들은 대개 심리적 안정을 되찾도록 휴식 시간을 준다. 잠시 책을 놓았다가 다시 잡으면 공부가 잘 되는 수험생의 슬럼프 탈출법과 마찬가지다. 최희섭 역시 이틀 동안 푹 쉰 후 5월19일 경기에서 2안타, 20일 경기에서 시즌 10호 홈런을 날리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방법도 있다. 방망이가 침묵하고 있는 4번 타자를 잠깐 6번으로 내리기도 하며, 위력을 잃은 마무리 투수를 9회보다 덜 긴박한 7회에 등판시킨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승엽의 2군행 역시 부담이 덜한 상황에서 정상을 찾고 복귀하라는 배려이다.
슬럼프일수록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감독도 있다. 대체로 신인 선수들에게 적용되는 치료법이다. 1951년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리오 듀로서 감독은 무안타에 시달리는 신인 타자 윌리 메이스를 줄기차게 기용했다. 결국 메이스는 스물네 번째 타석에서 당대 최고의 왼손 투수인 워렌 스판을 상대로 데뷔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이 홈런을 시작으로 메이스는 역대 4위인 6백60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슬럼프에는 훈련이 보약이라는 주장도 있다. 얼마 전 삼성 라이온즈의 선동렬 투수코치는 9연패의 늪에 빠진 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경기 전 외야 양측 폴대를 세 바퀴 왕복해 달리게 했다. 이것은 호시노 전 주니치 감독이 슬럼프를 퇴치할 때 사용하는 전매특허다. 삼성은 비록 당일 경기에서 패하며 10연패했지만, 다음날의 승리를 시작으로 2연승을 기록했다.

슬럼프에는 주변 사람의 한마디가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1983년 LA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감독은 자신감을 잃고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던 신인 투수를 불러 ‘불도그’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후 불도그처럼 타자를 물어뜯기 시작한 이 투수는 팀의 에이스로 성장해 사이영상과 월드 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 박찬호의 사형이자 코치인 오렐 허샤이저 이야기다.

때로는 엉뚱한 방법이 효과를 본다. 마이너 리그 선수인 존 메할피는 27타수 무안타의 극심한 부진에 빠지자 남 몰래 알약 하나를 먹었다. 메할피가 복용한 약은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 방망이를 불끈 세운 메할피는 그 날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날리며 슬럼프에서 탈출했다.

부진할 때마다 머리를 깎는 ‘삭발 투혼’은 한국 야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연패를 거듭하던 삼성 선수들은 너나없이 머리를 박박 밀었다. 하지만 메이저 리그에서는 신기한 일이다. LA 다저스 시절 삭발과 면도로 마음을 다지고 슬럼프에서 탈출하려고 애쓴 박찬호의 모습은 지역 언론의 가십거리이기도 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슬럼프는 오히려 자신감을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슬럼프를 극복하면 자신감이 배가된다. 최희섭과 이승엽도 마음 걱정을 덜어내고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면 더 힘찬 모습으로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