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시인 조병준의 ‘마더 테레사의 집’ 체험기② 평화로운 죽음 이끄는 ‘큰 사랑’
  • 조병준 (시인) ()
  • 승인 1995.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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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렘단에서의 아침은 수녀들의 기도와 함께 시작된다. 맨 처음 일은 청소. 남자 환자 1백50명이 기거하는 병동 3개를 샅샅이 쓸고 닦는 일인데, 우선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세면장으로 옮겨야 한다.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환자들과 정신박약자들이 모여 있는 중간 병동은 밤새 배설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결핵환자와 노인, 부상자들이 있는 양쪽 병동은 그래도 낫지만 세 병동 모두 철제 침대를 쌓아올리고 물청소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오물 범벅인 물바다를 수녀들과 봉사자들은 맨발에 샌들로 아무 거리낌없이 철벅철벅 헤집고 다닌다.

물청소가 끝나면 물기를 말리기 위해 2인 1조가 되어 큰 담요를 끌고 바닥을 몇 번씩 왕복한다. 물에 젖은 담요를 바닥에 끌고 다니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해 본 사람은 모른다. 침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몇 사람이 1백50개나 되는 침대 하나하나를 소독액으로 닦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 수만큼 매트리스를 닦는다. 매트리스가 마르면 다음은 침대보를 덮는 순서. 매일 아침 이 일을 되풀이한다. 어느 나라의 병실 바닥이 그보다 깨끗할 수 있을까. 청소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봉사자들은 환자들을 씻긴다.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환자. 목욕이 싫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환자. 샤워가 아니라 물을 끼얹어 하는 목욕장은 아침마다 아수라장이다. 오물과 밤새 더러워진 붕대, 물소리와 아우성 소리로 가득찬 프렘단의 목욕장. 아수라장이지만 그곳은 즐거운 아수라장이다. 봉사자들과 환자들이 몸으로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일은 수녀들과 함께 하지만 이 일만큼은 꼭 봉사자들의 몫이다.

그렇게 청소와 목욕이 끝나면 다음 일은 빨래다. 물론 세탁기는 없다. 비눗물에 삶은 빨래를 건져 방망이로 두드리고 헹궈 옥상의 빨랫줄에 넌다 . 수돗물이 시원찮은 날에는 우물터까지 빨래를 운반해야 하고 물 긷는 일까지 해야 한다.

오전 일을 모두 마치고 프렘단을 나서면 길가에서 옥상에 널린 빨래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깃발들은 마치 전장에 널린 형형색색 깃발들 같다. 고지를 탈환한 듯한 기쁨을 선사하는 우리의 깃발들. 프렘단의 아침은 전투에 버금간다. 봉사자들의 휴일인 목요일을 빼고 매일 벌어지는 즐거운 전투.

빨래가 유독 많은 날에는 10시 반부터 시작되는 휴식 시간을 못 누리는 봉사자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좁은 빨래터에 모든 봉사자가 달려들 수도 없다. 빨래터에서 밀려난 일부 봉사자는 환자들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주거나, 몸에 기름 바르기를 좋아하는 인도인들에게 마사지를 해주기도 한다. 한가한 날이라면 그냥 환자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정신이 ‘어린’ 환자들과 놀아주어도 좋다. .

환자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 그리고 인도인들은 천성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깡마른 손에서, 검은 얼굴의 미소에서 봉사자들은 충분히 감사와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몸으로 부딪치는 사랑’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나이·국적·종교가 백인백색인 봉사자들

그러는 동안 의료 경험이 있는 봉사자들(의학을 전공하거나 프렘단에 와서 현장 교육으로 다져진 고참들)로 이루어진 간호팀은 ‘의료 봉사’를 담당한다. 치료라야 상처를 소독하고 새로 붕대를 감아주는 일이 고작이지만, 의료 혜택이라고는 거의 받아본 적이 없는 이곳 환자들에게는 매우 요긴하다. 봉사자가 해결할 수 없는 환자들은 병원으로 후송하거나 의료 담당 수녀들이 치료한다. 길에 쓰러져 있다가 수녀님이나 봉사자, 혹은 현지인들이 데려온 신입 환자들은 크건 작건 몸에 상처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상처를 헤집고 벌레들을 핀셋으로 일일이 끄집어 내야 한다.

신참 봉사자들이 막바로 간호팀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간호팀은 대개 몇달 넘게 일해온 고참들이 맡는다. 경험도 경험이거니와 제발로 오지 않는 환자들을 찾아 데려오려면 환자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박약한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3~4명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이 제대로 진행되면 10시 반부터 30분 정도 휴식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그때는 봉사자들끼리 친구가 되는 시간이다. 땀을 한껏 흘린 다음에 마시는 더운 차, 그리고 환자용으로 기증된 네덜란드제 프로틴 비스켓. 캘커타를 떠난 봉사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들이다.

스페인에서 핀란드에 이르는 전 유럽, 아르헨티나에서 캐나다에 이르는 미주 대륙, 그리고 유일하게 비백색 인종인 일본의 젊은이들이 봉사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어쩌다 남아프리카나 인도양의 섬나라 출신 봉사자를 만나지만 그들도 백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끔 싱가포르 사람들이 눈에 띄는 정도이다. 그리고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참 반갑게 찾아오는 한국 사람. 아쉽게도 여행길에 들른 사람들이라 짧으면 하루, 길면 1주일쯤 머물다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봉사자는 나이에서 직업, 종교, 살아가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백인 백색이다. 그저 평범한 생물학과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록그룹 리더도 있다. 10대 시절을 마약과 방탕으로 보냈다는 청춘이 있는가 하면 대학의 신학 교수도 있다. 열아홉 살 ‘꼬마들’이 있는가 하면 은퇴한 반백의 노부부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모두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휴식 시간이 끝나면 기다리던 점심 시간이다. 환자가 3백명인 데다 주변 빈민들을 위한 무료 급식분까지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점심식사는 그 양이 엄청나다. 쌀밥과 카레뿐이지만 밥이 모자라는 일은 한 번도 없다. 1주일에 한 번은 고기도 나온다. 잘사는 나라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형편없는 식사일 수도 있지만 환자의 대부분은 거리에서 한 끼 밥을 구걸하던 사람들이다. 또 인도인 대부분의 식사는 바로 그 수준이다.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고, 나머지는 봉사자들이 접시를 날라다 주거나 먹여준다. 식기라야 환자 1인당 양은 접시 하나와 물컵뿐이다. 인도인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환자를 병상으로 옮긴다.

취사용 석탄재를 걸러 만든 자연 세제로 설거지를 하는데, 수세미는 코코넛 껍질로 만든 것이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식사 장소를 물로 씻어낸다. 그래도 건강한 축에 속하는 환자들은 설거지와 청소에 동참한다. 설거지 끝. 청소 끝. 프렘단의 아침 일은 그렇게 12시를 전후해 끝난다. 아무리 길이 든 고참들도 이때만큼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보수 없이 하는 일에서 노동의 신성함 배워

우연히 아침 일을 함께 한 한국인 관광객 한 사람은 빨래 일에 특히 충격을 받고는, 돌아가면 돈을 벌어서 세탁기 몇대 기증해야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결코 세탁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기부금의 액수는 사실 만만치 않다. 돈이 없어서 세탁기를 들이고 수도를 설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남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캘커타에는 노동의 신성함이 살아 있다. 몽당 싸리비와 빨래방망이에 담긴 노동의 신성함. 일이 얼마나 사람을 신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보수 없이 오로지 남을 위해 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 신명으로 인해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하는 일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된다. 일이 꿈이 된다.

오전 일과를 마치면 봉사자들은 오후 일을 먼저 하거나, 쉬거나, 개인적인 일을 한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처리한다. 몸이 아프면 며칠 일을 안해도 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며칠 나타나지 않으면 초콜릿이나 비스켓을 들고 찾아간다. 힘들게 먹고 자면서 고된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다. 거기에 착하고 열린 마음을 갖추고 있다.

캘커타 마더 테레사의 봉사자들 사이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특별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영어로 말해야 하는 불편이 있지만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환상적이다. 서로 아껴주고 칭찬해 주는 일도 봉사자들의 일이다.

경쟁과 비방이 없는 나라, 콜라 한 병을 사 마셔도 함께 마시겠느냐고 묻는 나라, 각자 자기 일을 알아서 하면서도 챙길 것은 서로 챙겨주는 나라. 유년기를 벗어난 이후 그런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약육강식, 자연 선택의 논리가 판치는 자본주의 사회 사람에게는 캘커타의 공동체가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수녀들이 지극한 애정으로 아프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캘커타를 떠날 때, 봉사자들은 남녀 없이 눈물을 떨군다.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라….

내가 겨우 열흘이라는 전제 아래 겁없이 시작했던 칼리가트의 오후 일은 프렘단의 일과 거의 비슷했다. 청소와 목욕과 빨래와 식사. 프렘단의 일과 다른 점은 봉사자들이 오후에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는 정도이다. 일 자체는 비슷했지만 프렘단과 칼리가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프렘단이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의 집이라면, 칼리가트는 ‘죽어가는 빈자들을 위한 집’이라는 이름처럼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이었다.

남녀 각각 50명의 환자가 있다. 오후 3시에 시작되는 첫 일은 점심 식사 후 더러워진 환자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이다. 50명 중 20명 정도는 언제나 중환자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까지. 그들을 돌보는 고약한 일들을 ‘잘 먹고 잘 살았던’ 봉사자들이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잘 해낸다.
남녀 각각 50명의 환자가 있다. 오후 3시에 시작되는 첫 일은 점심 식사 후 더러워진 환자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이다. 50명 중 20명 정도는 언제나 중환자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까지. 그들을 돌보는 고약한 일들을 ‘잘 먹고 잘 살았던’ 봉사자들이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잘 해낸다.

그리고 빨래. 겨울철이면 담요를 빠는 일은 상당한 중노동이다. 아일랜드에서 온 존이 이름하여 ‘칼리가트 담요 세탁법’을 개발해 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빨래 욕조 위에 올라 서서 담요 양쪽을 잡고 소독약이 담긴 물속에 담갔다가 빼내며 쳐대기를 반복하는 방법이다. 물살과 공기방울을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 세탁기.

담요에 묻은 오물은 솔로 문질러 떼어낸다. 그 일을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이가 많다. 아침 봉사자들이 해놓은 빨래를 걷고 그 자리에 다시 젖은 빨래를 넌다. 늦게 빨래가 끝나는 날에는 칼리가트 옥상에서 캘커타의 석양을 볼 수도 있다. 스모그로 언제나 뿌연 캘커타 하늘이지만 그래도 칼리카트의 석양은 참 아름답다.

별나고 아름다운 삶으로의 여행

빨래가 끝나면 1주일에 두세 번 자원봉사하러 오는 인도인 의사들의 처방대로 약을 나눠준다. 때로 약을 그냥 버리는 환자가 있어 약을 다 삼키는지 옆에 앉아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도 간호원 출신이나 고참들은 수녀들이 담당하는 간호 일을 돕는다. 중환자들이 많아 칼리가트의 간호팀은 좀더 전문적이다.

환자들은 4시 반께 저녁을 먹는다. 가끔 밥과 카레를 거부하고 비스켓과 우유를 달라는 환자도 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우유나 다른 영양식을 주지만, 그저 떼를 쓰는 환자에겐 야단도 친다. 그러나 환자들의 대다수가 결핵을 앓고 있어 잘 먹여야 한다.

칼리가트를 거쳐간 환자는 수만 명에 달한다. 초기에는 거의 절반 정도가 죽어 나갔다지만 이제는 의료 기술의 발달과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 수준 덕분에 예전처럼 많이 죽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살려고 애쓴다. 수녀와 봉사자 들도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려고 애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봉사자들은 그 주검을 닦고 흰 천으로 덮어 묘지나 화장터로 보낸다. 그러나 칼리가트에서의 죽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음과 조금 다르다.

마더 테레사가 세상에서 처음 지은 집이 칼리가트였다. 1910년 8월27일 유고슬라비아의 알바니아계 집안에서 태어난 테레사가 캘커타에 온 것은 28년 11월이었다. ‘로레토 수녀회’ 학교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던 테레사 수녀는 48년 8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는 수도복을 벗고 지금의 푸른 줄이 쳐진 하얀 사리를 걸친 채 캘커타의 거리로 나섰다. 52년에는 ‘영생의 집’이라 부르는 칼리가트의 문을 열었다.

칼리가트는 원래 힌두교의 여신인 칼리의 신전을 말한다. 칼리는 죽음과 파괴의 여신이다. 지금 마더 테레사의 집은 그 칼리가트를 찾아온 힌두교 순례자들의 숙소였다. 캘커타 시청의 도움으로 마더 테레사는 그곳을 행려병자 구호소로 만들었다.

지금도 칼리의 신전과 마더 테레사의 집은 나란히 붙어 있다. 신전에서는 매일 칼리 여신을 위해 검은 염소의 목이 잘린다. 죽음의 여신의 신전과 마더 테레사의 ‘죽어가는 빈자들을 위한 집’은 기이한 대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과연 별개의 것인가. 사멸 없이 탄생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많은 종교가 죽음이 곧 새 삶의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마치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손길 안에서 평화롭게 죽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필요성은 충분하지 않은가.

첫째날, 둘째날 캘커타의 일을 할 때 나는 그저 열흘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해보지 않은 중노동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환자들의 참상을 매일 대하는 것이 끔찍했다. 칼리가트의 첫날 오후에 나는 죽음을 보았고, 죽음을 만졌다. 거리에서 살다가 죽어간 사람. 겨우 며칠, 아니면 몇 시간의 삶을 남긴 그들에게 다른 이들의 도움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들을 돕는다고 잠시 머무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격한 슬픔과 분노와 회의를 가졌던 때가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열흘을 버티기로 한 것은 순전히 약속 때문이었다. 내가 합의한 약속.

열흘이 지났지만 나는 캘커타를 떠나지 않았다. 마드라스에도, 바라나 시에도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행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배웠다. 눈물과 회의 대신에 웃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야 할 일이 세상에 널려 있음을 배웠다.

마더 테레사의 형제자매들은 내 배움의 스승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할 수 있었을 삶을 포기하고 힘든 봉사의 삶에 들어선 수녀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닌 자원봉사자 친구들. 그들을 매일 만나고 그들의 삶과 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그 어떤 여행보다 좋은 경험이었다. 참으로 별나고 아름다운 삶으로의 여행이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스페인 친구 하나가 런던으로 오라고 했다. 한번 다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고, 캘커타는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서울에 들러 식구들에게 인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3개월을 런던에 머문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캘커타의 친구들도 만날 겸해서였다. 프랑스·스위스·독일·스페인 여행은 고스란히 캘커타의 연장이었다.

4개월에 걸친 유럽 여행 동안 나는 비싼 유럽의 기차표와 비행기표 값을 포함해 고작 1천5백달러(1백20만원) 정도밖에 안썼다. 친구들이 먹여주고 재워준 것이다. 캘커타의 공동체 정신은 유럽에서도 살아 있었다. 캘커타라는 공통분모가 없었다면 그들이 내게 그렇게 잘해 줄 수 있었을까.

캘커타는 모두에게 ‘좋은 학교’

캘커타의 친구들은 캘커타를 떠난 후에도 여전히 캘커타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에이즈 환자 구호단체에서 봉사활동하는 친구, 가족 없는 노인들을 정기 방문해 보살피는 친구, 대도시에 있는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는 유럽 지역 무료 급식소나 ‘집’에서 일하는 친구, 아예 직업을 사회봉사 관련 직종으로 바꾼 친구…. 그들은 한결같이 캘커타를 그리워했다. 많은 친구들이 캘커타로 돌아갈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나 또한 캘커타가 그리웠다. 3개월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행 표를 팔고, 캘커타행 표를 샀다. 그저 두어 달만 있다가 돌아가자. 그런데 꼬박 다섯 달을 살았다. 긴 여행에 지친 탓인지, 몸의 기운이 지난번처럼 쌩쌩하지는 않았다. 무작정 행복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때로는 까닭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도 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 저녁 일과 후에 열리는 묵상 기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 그저 아무 말 없이 침묵에 잠겼다. 아침에, 혹은 오후에 죽어간 환자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아니면 내 삶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감히 끼여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프렘단의 간호일에도 참여했다. 산 자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처에 칼과 손을 들이댔다. 신참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어느새 나도 고참 ‘발런티어’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캘커타는 분명 첫 번째와는 달랐다. 그러나 나는 다른 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조금 더 깊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던 차에 잠시 바람을 쐬러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에 나선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캘커타에 돌아왔는데 덜컥 병이 들어 버렸다. 40도를 웃도는 고열과 설사·구토·통증이 이어졌다. 친구들이 병원으로 나를 실어날랐고, 수녀들과 친구들이 매일 병원으로 찾아왔다. 약과 초콜릿과 중국 식당의 쌀죽과 씨 발라낸 수박을 들고. 병원비를 선납해 주었던 미국 친구 리처드는 돈 달라는 얘기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녀들이 약을 모두 댔고, 수녀들이 구하지 못하는 약을 사온 친구들은 돈이 얼마나 들었느냐는 내 질문을 무시했다.

말라리아와 티푸스라는 아리송한 진단 아래 링거액과 항생제 주사로 보름을 살았다. 병이 심하던 첫 1주일 동안에는 봉사자 친구들이 24시간 교대로 내 병상을 지켰다. 나무 걸상 4개를 이어 참대 삼아 자면서 말이다.

퇴원 후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가끔씩 프렘단과 칼리가트를 찾았다. 수녀들과 친구들은 일할 힘이 빠진 내가 일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숨쉬기도 힘든 4월의 캘커타. 나는 캘커타를 떠나오면서 조금 울었다. 울었다는 이야기를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는 것은 캘커타에서 눈물이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서울에서도 캘커타에서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웠다. 마더 데레사의 말씀처럼 캘커타는 내게,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학교’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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