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최면’ 걱정된다
  • 강석진 (서울대 교수) ()
  • 승인 199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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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취리히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가 열리고 2002년 월드컵 개최지가 결정된다. 그동안 숨가쁜 경쟁을 벌여오던 한국과 일본의 명암이 갈리게 되는 것이다. 지난 5월10일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이 2002년 월드컵 한국 유치를 확신한다고 천명한 이후 우리 나라 언론들은 월드컵 유치를 낙관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믿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포츠 전문지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지지 9명, 일본 지지 8명, 부동(浮動) 4명으로 한국이 오히려 약간 앞선 상황이라고 한다. 우리가 부동표 둘만 더 끌어들인다면 ‘취리히 신화’ 탄생이 불가능하지 않다.

일본보다 3년이나 늦게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든 우리나라는 여러 모로 불리한 여건이다. 세계 2위 규모인 일본의 경제력, J리그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축구 문화와 경기 시설, 그리고 기업의 국제성이라든가 대회 운영 능력에서 일본은 우리를 크게 앞서 있다. 우리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은, 우리는 이미 네 번이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전력이 있지만 일본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FIFA의 세계 랭킹을 보면 일본은 세계 30위권 안에 진입한 반면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50위권 바깥이다. 따라서 축구 실력을 무기로 하는 우리의 명분론은 생각보다는 간단하게 뒤집힐 수 있다. 우리나라가 처음에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이던 것을 근소한 접전까지 몰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저런 명분보다는 처음부터 일본으로 기울어 있던 아벨란제 회장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20여 년간 지속된 그의 독주에 반발하는 유럽쪽 집행위원들을 집중 공략한, 도박에 가까운 작전과 온 국민의 ‘월드컵 열기’덕분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국민이 월드컵 유치를 위하여 보여준 분위기는 열기를 넘어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문마다 방송마다 ‘2002년’을 부르짖고, 무슨 행사가 열릴 때마다 ‘2002년 월드컵 유치 기원’이라는 접두사가 붙었으며, 심지어는 ‘2002년 월드컵 유치 기원 2002미터 걷기 대회’마저 열렸으니 이건 숫제 ‘2002 공해’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은 국민을 ‘월드컵 최면’에 걸리게 하여 사생결단의 국면으로 몰고 가더니, 때때로 자신이 없어진듯 공동 개최를 들고 나오는 등 헷갈리게 만들고, 기업은 기업대로 2002년을 빙자한 구호를 내세우며 ‘2002 공해’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열기의 절정은 지난 2월에 열린 ‘범종교인 월드컵 유치 기원대회’였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국적을 의심케 하는 희극 중의 희극이었다.

유치 여부에 관계없이 떳떳하고 당당한 태도를

하기사 월드컵처럼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거대한 이벤트를 정치권과 기업인들이 이용하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월드컵이 축구 대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한다고 해서 즉시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회가 하루아침에 살기 좋은 사회로 탈바꿈하는 것도 아니다. 월드컵을 두 번씩이나 개최했던 멕시코의 예만 봐도 월드컵 열기의 거품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있다. 쓸데없이 들뜨기보다는 차분한 자세로 우리 사회 전반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일본에게 월드컵 개최권이 넘어간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빼앗겼던 나고야 시가 그 뒤에 망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만의 하나 월드컵 유치에 실패했을 때 국민이 느낄 허탈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정치인·경제인·언론이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 국민은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 결정이 며칠밖에 남지 않은 지금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를 저울질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는 그동안 여러 가지 불리한 형편에서도 월드컵을 유치하려고 헌신해온 관계자 모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자세로 6월1일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도 내기를 걸라면 나는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한다는 쪽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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