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보혹감시원 된 환경운동가 최종인씨
  • 金恩男 기자 ()
  • 승인 2000.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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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치 시화호의 영주 같다.

그가 갖고 있는 열쇠만이 시화호 남쪽 간석지로 통하는 철문을 열 수 있다. 그의 영토는 멀리 시화·반월 공단을 배경으로 하여 광활하게 펼쳐진 소금땅. 그의 백성은 소금땅 군데군데 자리잡은 갈대밭을 은거지로 삼아 번식하는 노루·고라니·산토끼 그리고 철새 들이다.

요즘 영주는 마음이 즐겁다. 그의 영토 일부가 신성 불가침 지역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22일 문화재관리청은 공룡알 화석 2백여 개가 발견된 시화호 남쪽 간석지 4백80만 평 일대를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했다.

2년 전 이들 공룡알 화석을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린 것이 그였다. 새 둥지를 보살피다가 발견한 야구공 크기의 둥근 화석. 한국해양연구소에 화석 사진을 들고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이 화석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게 될지는 몰랐다.

화석에서는 전형적인 공룡알 껍질 구조와 기공(氣孔)이 관찰되었다. 수도권에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학계는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 지질 조사 결과 시화호 일대는 약 1억2천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의 집단 산란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최종인씨(46)의 삶은 평범했다. 사진과 바다를 몸살 나게 좋아했다는 점이 유별나다면 유별났을까? 1970년대 중반 국산 ‘코비카 카메라’가 처음 나온 시절부터 찍기 시작한 사진은 그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었다. 바다는 내성적인 그의 안식처였다. 전남 장흥 산골짜기에서 자라며 ‘기차 타고 바다 한번 보러 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틈만 나면 바다를 찾아다녔다.

1989년 그가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한 것도 오직 바다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다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망둥어 낚시를 즐기던 해안은 도로로 복개되었고, 사리 포구는 폐쇄되었다.

“최선생 눈썰미는 국보급”

결정적인 것은 시화호였다. 바다를 막아 인공 호수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를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조제를 쌓고 물막이 공사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되어 시화호는 썩어들어 갔다. 시화호를 찾은 그는 망연자실했다. 공단에서 흘러든 폐오일이 시화호를 검게 물들였고, 한때 개펄이었던 간석지 곳곳에는 조개 썩는 냄새가 지독했다.

그가 피사체를 바꾼 것은 이때부터였다. 꽃·나무·곤충은 이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신 떼죽음한 물고기, 하천에 버려진 폐기물, 염분만 남은 개펄에 주저앉은 농부, 청테이프가 부리에 휘감긴 왜가리 따위가 그의 카메라 앵글을 채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외곬 성격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IMF 구제 금융 한파가 온나라를 덮치기 직전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철없는 남편 행동에 아내는 진저리를 쳤지만 그럴수록 그는 시화호를 파고들었다. 지난 4년간 그는 128㎞에 이르는 시화호 주변을 걸어서 세 바퀴쯤 돌았다.

그가 공룡알 화석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시화호 구석구석을 사시사철 꼼꼼히 들여다본 결과 그는 웬만한 학자는 흉내도 내지 못할 대발견을 여러 차례 했다. ‘최선생 눈은 우리나라의 보배’라는 박강호 과장(안산시 환경보호과)의 말마따나, 이같은 발견은 범상치 않은 그의 눈썰미 덕택이기도 했다.

남들 같으면 무심하게 스쳐갈 흔적을 그는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공룡알 화석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섬향나무 열두 그루가 시화호 일대에 자라고 있음을 밝혀냈고, 멸종 위기에 처한 검은머리갈매기를 국내 최초로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지난 3월6일에도 그는 공룡알 화석을 발견한 장소로부터 2백m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식물 화석을 발견했다. 쥐라기(약 1억5천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은 중생대의 자연 환경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는 운이 퍽 좋은 사람이다. 지역 환경운동가이면서도 그는 시화호 문제에 대한 여론을 전국적으로 환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운이 좋았던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시화호가 살아나는 것을 그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목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수질이 개선되지 않자 1997년 정부는 급기야 배수갑문을 열어 바닷물을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시화호의 생태계는 서서히 살아났다.
소금기만 허옇게 널려 있던 간석지에 염생 식물이 하나 둘 자라더니 어느덧 갈대밭이 군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갈대밭은 산토끼·노루·고라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자생적으로 조성된 호수 주변은 철새가 쉬거나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자리잡았다.

최씨는 경외감으로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았다. 더 이상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된 땅이 보여주는 치유력은 놀라웠다. 올 겨울 시화호에 날아든 겨울 철새는 대략 15만5천 마리. 아직 환경부가 공식 통계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시화호가 서해안 최대의 철새 도래지로 떠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화호를 찾아드는 새 종류만도 청둥오리·흰뺨검둥오리·흰죽지·장다리물떼새 등 100 종이 넘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최씨는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철새와 비례해 늘어나는 밀렵꾼과의 전쟁이 그것이었다. 3년 전 그가 처음 밀렵 감시 활동을 시작했을 때 경찰은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역 유지가 대부분인 밀렵꾼들은 “안산에서 총 맞을 ×이 하나 있다”라며 펄펄 뛰곤 했다.

밀렵꾼에게 드잡이를 당한 것만도 여러 차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밀렵꾼이 오가는 길목을 승합차로 가로막아 놓고, 마을로 줄행랑치기도 했다. 그러나 안산시가 최근 그에게 조수보호감시원이라는 감투를 씌워 준 이래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밀렵꾼은 없다(감시원이 된 덕분에 그가 간석지 입구 열쇠를 관리하고 있다).

조수보호감시원에게 특별한 인적·물적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6년을 끌고 다닌 애마(엄밀히 표현하자면 주행 거리 18만㎞가 넘은 고물 승합차)에 각종 장비를 싣고 홀로 시화호로 떠난다. 어떤 날씨에나 적응하기 위한 야전 점퍼 세 벌·판초 한 벌, 800㎜ 망원 렌즈를 비롯한 각종 렌즈와 고성능 망원경, 무전기·서치라이트·폐쇄 회로 텔레비전, 차량 견인 장치에서 전기 커피포트·간이 호박죽에 이르기까지 승합차에는 없는 것이 없다.

온몸이 얼어붙는 겨울 밤, 새 사진을 찍거나 밀렵꾼을 기다리기 위해 사방 1m 폭의 위장망 속에 웅크리고 있노라면 때로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형님과 뜻을 같이하겠다’며 호기롭게 달려들던 후배들은 하나 둘 최씨 곁을 떠났다. 최씨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환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끔 여건을 마련해 주지 못한 자신의 무능이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최씨가 감상에 빠지는 시간은 길지 않다. 공룡알 화석 산출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됨으로써 ‘해방구’ 한 조각을 확보했다지만, 최씨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정부 당국이 여전히 시화호 일대를 항만·농지·공단 따위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화호를 또다시 망치는 것은 후손에 대한 죄악입니다.”시화호 전역을 생태 공원으로 만들기까지 그는 자연으로부터 위임받은 영토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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