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화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실장 "9월에 농민대란 일어날 수 있다."
  • 권은중 기자(jungk@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투(夏鬪)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농민이 도저히 못살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한창 바쁜 여름 농사를 접어두고 농민들이 서울 대학로에 모인 7월25일에는 한국과 칠레의 제4차 자유무역협상이 열릴 예정이었다. 농산물 수출국인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게 되면, 최근 마늘 농가가 겪는 아픔이 모든 과수·축산 농가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농민을 땡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로 불러모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농민을 위한다며 화려한 공약을 내놓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정작 농민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농산물 시장의 빗장만 열어 분통이 터진다고 말한다. 정부는 ‘경제가 어렵다’ ‘경쟁력을 갖추라’는 말로 농민을 달래고 있지만 농민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한다. 오는 9월 전국농민대회를 기점으로 극한 투쟁도 불사한다는 각오이다. 수배된 정광훈 위원장을 대신해 전농 이종화 정책실장이 인터뷰에 응했다.

7월25일 농민대회는 왜 열게 된 것입니까?

농민이 삼복 더위에도 불구하고 1만5천명이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개방만이 살길’이라며 정부가 농·축산물을 마구 수입해 국내 농산물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농민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오렌지와 마늘을 수입해 제주도·전라도·경상북도 농민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정부는 중국과 굴욕적인 마늘협상을 마무리한 데 이어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칠레와 자유무역협정까지 체결하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농업은 죽습니다. 농촌에 애정을 갖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초발심으로 돌아가 제발 농촌의 현실을 똑바로 봐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다고 하던데요.

경찰은 신고된 집회였는데도 대학로를 막고 깃발과 수박·마늘 따위 농산물을 빼앗았습니다. 또 종묘공원까지 예정된 거리 행진을 막았고, 전농의 방송 차량도 파손했습니다. 심지어 경찰은 어린아이의 이마저 부러뜨릴 정도로 과잉 진압을 했습니다. 최루탄을 안 쏜다더니 농민에게는 사과탄을 던졌습니다.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이 그렇게 농민에게 위협이 됩니까?

칠레는 농산물 수출국인 케언즈 그룹 회원국입니다. 남미 대륙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칠레는 다양한 기후 조건을 갖고 있어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또 외국 자본이 오래 전부터 투자해 농업 분야의 경쟁력이 뛰어납니다. 한 가지 예로 국내에 칠레 포도가 몇 년 전부터 수입되었습니다. 이 칠레 포도 때문에 국내 거봉 포도 재배 농가가 큰 손해를 봤습니다. 정부는 몇 년 전부터 포도가 고소득 작물이라며 농민에게 많이 심으라고 적극 권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포도 농사를 지은 농가만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칠레가 경쟁력을 가진 과일과 축산물을 수입 개방할 경우 과수·축산 농가는 몰락합니다.

중국과 맺은 정부의 마늘협정은 어떻게 보십니까?

한마디로 굴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보장한 긴급관세를 부과하고도 쩔쩔매는 꼴이라니. 주권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행정력과 협상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중국 마늘이 들어온 후 농민은 kg당 1천5백원인 최저 생산비도 못 건지고 있습니다. 마늘은 그나마 농민이 짭짤한 수익을 얻던 ‘효자 작물’이었습니다. 국내 시장 규모도 3조원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정부가 마늘 농가를 보호하려고 ‘소탐대실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부품의 80%를 수입해다 조립하는 휴대폰을 수출하기 위해 마늘 시장을 포기해야 합니까? 특히 전국 마늘의 40% 이상을 생산하는 전남 지역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전남 지역 농민이 지난 수십 년간 선거 때마다 누굴 찍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지역 농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더 큽니다.

전농은 농가부채특별법·WTO이행특별법·농업협동조합법·농업재해보상법 네 가지를 주장하는데, 어떤 것이 핵심입니까?

모두 중요하지만 정부가 농가 부채와 시장 개방의 충격을 줄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농가부채특별법과 WTO이행특별법에 농민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림부는 정부가 돈을 갚아주면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고 반박하던데요.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농림부는 농민을 돈을 쓰고 안 갚겠다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몰아가는데, 농민이 과연 그런 사람들입니까. 우선 연대 보증을 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정부가 법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자돈을 빌려 농사를 지을 것 아닙니까. 현재 농산물의 기대수익률은 5%에 불과합니다. 대출 이자 12%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빚 갚기 위해 빚 내는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부채 때문에 농민들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신용 불량자로 찍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연체 이자를 탕감해 주고 장기 저리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한 바로는 이 일을 하는 데 1년에 1조5천억∼2조 원이 듭니다. 결국 이 돈을 아끼려고 농민을 파탄으로 몰아 가고 있습니다.

농협 개혁도 이런 관점에서 필요한 것입니까?

농협은 애초부터 농민의 권익이 아니라 정부의 농촌 지배를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또 농민의 경제적 이익보다는 수익 사업에 혈안이 되었고, 결국 정권에 뒷돈을 대는 불법 행위를 거듭해 왔습니다. 지난 6월 통폐합된 농협 역시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4년 이후로 미루어 놓은 신용사업과 농정 관련 경제사업 분리를 앞당겨 농협을 농민을 위한 생산자 조직으로 전문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통 개혁과 농산물 가격 안정을 실현할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져 국민 모두가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꼭 농민만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농민 탓이 아닙니다. 재벌과 관치 금융 때문입니다. 그런데 농민과 노동자가 그 어려움을 혹독하게 겪고 있습니다. 경기가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는 경기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어려우니까 농민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농민은 농산물 저가정책을 30년 이상 참아 왔습니다.
어려운 싸움을 할 것 같은데, 예상되는 가장 큰 난관은 어떤 것입니까?

예전에는 농민이 시위한다고 하면 국민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국민 대다수의 부모나 친지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의 고민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농민은 수많은 이익집단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국민들은 싼 농산품을 먹기 위해 수입품도 괜찮다는 비교우위론에 설득되었습니다. 하지만 농업은 생명 산업이고 기초 산업입니다. 경제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경쟁력과 효율성만 따지는 국민들의 무관심이 가장 어렵습니다.

앞으로 전농은 어떤 식으로 싸워나갈 것입니까?

전농은 농민을 살릴 수 있는 4대 개혁 입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9월에 대대적인 집회를 계획하고 있고, 정기국회에서 여야를 압박하기 위해 로비는 물론 장기 농성, 고속도로 점거와 같은 극한 투쟁을 함께 벌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작지만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농민들은 더 참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