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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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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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치고 노래하고 작곡에 영화음악까지 동서양 아우르는 만능 음악인
작곡은 영어로 컴포지션이다. 기본 뜻은 구성이다. 음악은 곧 구성인 것이다. 신세대 국악인 원 일씨(31)가 작곡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그의 음악이 국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감안할 때 뜻이 깊다. 국악에서 시작한 음악가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마련인 전통과 창조의 갈림길. 그는 답습보다 재창조를 택했다. 삶의 기반이 바뀐 마당에 예전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을 음악을 통해 구성해내기 시작했다.

신세대 국악인 원 일씨는 동서양 음악을 아우르는 작곡가이다. 자신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 가수이며, 북의 리듬에 몸을 실을 줄 아는 타악기 주자이기도 하다. 곡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면서 몸과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복한 음악가인 것이다.

타악 그룹 푸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프로젝트 그룹 어어부 밴드에서‘북치는 소년’의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종상 음악상을 수상한 영화 <꽃잎>을 비롯해 <한국 영화 씻김> <강원도의 힘> <아름다운 시절>의 영화 음악을 맡았으며, 독집 음반 <아수라>에서는 가수 겸 작곡가로 재능을 펼쳐 보였다. 그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장선우 감독이 <한국 영화 씻김>의 영화 음악을 맡긴 후부터다. 특히 <강원도의 힘>은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주목을 받았던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고, <아름다운 시절>은 예술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이광모 감독의 첫 작품이어서 차세대 영화 주자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주목되는 것은 비단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묻고 그에 따라 활동을 조직하는 문화 전략가의 면모를 보인다. 일찍이 추계예대 재학 시절 국악 그룹 ‘소리사위’활동을 통해 국악이 당대의 문제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그는, 외국의 연주자들과 교류하면서 예술가에게도 전략이 필요함을 배웠다. 자신의 문화 행위가 미칠 파장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음악이 세계관까지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우리의 전통 음악에서 생명 예찬을 읽어낸다. 그 염원만큼 독집 앨범 <아수라>에는 선정적인 문화와 환경 파괴에 대한 반감이 생생히 배어난다. 그는 “건강한 생명을 예찬했던 전통 음악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말하자면 여성성의 회복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디오 저널리스트 안해룡

디지털 카메라 들고 진실 찾아 삼천리 기획·취재·촬영·편집 1인4역 다큐 작가

안해룡씨(37)는 프리랜서 르포르타주 작가이다. 펜이나 사진기가 아닌 비디오 카메라를 지니고 다닌다는 점이 독특하다. 안씨는 아시아에서 활약하는 프리랜서 작가 모임인 ‘아시아 프레스 인터내셔널’과 만나면서 비디오 저널리즘에 눈떴다. 그들과 제휴하면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는 비디오 저널리스트가 된 것이다.

안씨의 첫 작품은 외국에서 먼저 선보였다.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던 재일 한국인 이 철씨를 다룬 다큐멘터리 <그래도 조국을 사랑한다>가 일본의 텔레비전 채널 ‘아사히 뉴스타’를 통해 방영된 것이다. 이후 혼혈 가수의 삶을 다룬 <블랙 코리안> 등 네 편을 더 소개했다.

안씨는 그 작품들이 “영상 문법을 익히기 전이어서 문제 의식만 드러난 설익은 르포르타주들이었다”라고 쑥스러워한다. 이 후 그는 갖가지 사연으로 해외에 흩어져 살게 된 한국인들의 삶에 눈을 돌렸다. 중국에 남아 있는 종군위안부, 해외에 입양된 아이들,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실상을 취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몇년 동안 이 주제들에 매달렸다. 혼자서 기획·촬영·편집을 도맡는 1인 취재 시스템은 해외 취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디지털 카메라만 달랑 메고 단신으로 움직이므로 기동성이 뛰어났다. 사안이 불거질 때만 취재를 하는 기자와 달리 취재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보람도 컸다.

문제는 유통이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비디오 저널리스트의 르포르타주를 방영하는 <프리 존 2000>이라는 프로그램까지 있는데, 우리는 방송국의 외주 비율이 턱없이 낮은 탓에 독립 프로덕션조차도 제 구실을 못한다. 프리랜서 작가가 운신할 폭은 더욱 좁다.

한국에서 프리랜서란 고달픈 하청 인생이 되기 일쑤다. 기자들이 취재할 여력이 없거나 품이 많이 들어 꺼리는 일을 외부에 맡기는 예가 많은 것이다. 그는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존 언론이 욕심을 낼 만한 전문적이고 참신한 기획안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KBS <일요 스페셜>을 통해 방영할 6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하다. 중국 조선족의 변천사를 조명하는 이 작품은 안씨가 기획·촬영뿐 아니라 편집까지 도맡았다. 번거롭지만 취재 의도를 살리기 위해 자청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선례가 된다는 생각에서 마무리 작업에 더욱 정성을 쏟고 있다.
산업 디자이너 김소미

“제품 경쟁력은 문화에서 나온다”우리것 끌어안고 디자인 세계화 앞장

지난해 8월 미국 뉴욕에 있는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 플랫(PLATT) 연구소로 연수를 떠났다가 얼마전 일시 귀국한 김소미씨(29·212디자인 디자인실장)는 세계 산업 디자인의 근황을 전하는 대신, 우리의 전통 문화를 화제로 올렸다. 조상들이 가꾸어온 형태와 정신에서 한국 디자인의 세계화를 일구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여대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인 91년 11월 (주)212디자인에 입사한 그는 사장인 디자이너 은병수씨와 동료들, 그리고 은사장이 수시로 불러 함께 일하는 외국 디자이너들로부터 ‘디자인은 문화’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을 찾았다. 선조들의 조형 감각은 빼어난 것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안경집이 옛날 양반의 안경집과 너무 흡사했고,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가 내놓은 옷은 우리 한복의 선과 닮아 있었다.

김실장의 미국 디자인 연수는, 지난해 통상산업부가 공모한 ‘산업기반 기술 사업’ 과제에 선정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김씨는 전통 문화의 특징적 요소를 산업 디자인과 결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동안 학술 분야에서는 전통 문화를 천착했지만 디자인과 연관된 접근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평범한 명제가 되어 버린 ‘제품 경쟁력은 문화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의 결합은 아직도‘서태지가 갓 쓰는 형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그 흐름의 하나가 단순 소박함이다.

김실장이 보기에 국내 산업 디자인은 성형 미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미인은 서양의 미인이다. 특히 대학생들의 졸업전이 그렇다. 김실장은 세계 디자인의 추세가 전문화보다는 통합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뛰어난 디자이너는 프로듀서 개념을 갖고 다양한 전문성을 지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96년 웅진코웨이 정수기를 디자인해 ‘산업디자인 성공사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실장은, 요즘 정보와 인간의 감성이 어떻게 상품과 연결되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올 가을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가방에는 전통 문화와 현대가 어울리면서 인간의 감성과 문화적 기대를 채워 주는 디자인 스케치가 가득할 것이다.
''아이네트'' 대표 허진호

인터넷 서비스 선두 주자 열린 경영으로 IMF에도 ‘쑥쑥’

국내 인터넷 서비스 제공 업계는 ‘빅 3’이 장악하고 있다. 한국통신·데이콤·아이네트. ‘넷맹’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한국통신 아니면 데이콤이 선두 주자라고 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분야의 선두 주자는 아이네트이다. 인터넷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94년 8월, 6명이 4억원을 들고 출발한 벤처 기업.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연평균 매출액 증가율이 300%가 넘었다. 지난해 매출 목표가 2백40억원, 현재 직원이 1백50명에 이른다.

아이네트를 이끌고 있는 허진호 사장 (37)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 (주)휴먼컴퓨터와 (주)삼보컴퓨터에서 일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일에 미쳤다. 자신감이 있었다. 미개척 분야. 그가 걸어가는 곳이 곧 길이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단순 명쾌하다. “우리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잘할 것이다.”

95년 초가 가장 큰 위기였다. 인터넷 붐이 갑자기 일어났다. 대기업들이 인터넷 시장으로 진입하겠다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대기업과 경쟁해 이기려면 증자를 해야 했다. 허사장은 50%가 넘던 지분을 포기했고, 직원들의 지분도 18% 대로 낮추었다. 43억원을 증자하면서 사업 계획도 대폭 뜯어고쳤다. 그때 자기 지분을 고집했다면 오늘의 아이네트는 없었을 것이라고 허사장은 말했다.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을 우선하며 위기 관리 능력을 갖추는 것. 이것이 허사장이 꼽는 경영자의 조건이다. 허사장은 지난해 여름 IMF 시대를 예견하고 미리 대비해 큰 어려움 없이 새해를 맞았다. 아이네트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성적표를 받지 않는다. 전공도 따지지 않는다. 대신 문제 해결 능력과 인간 관계를 꼼꼼히 살핀다. 그래서 아이네트에는 괴짜가 많다. 전산학 전공자는 20% 미만이고, 직원들은 모두 30대 이하이다.

허사장은 정보통신 분야가 앞으로 서비스를 통합하는 체제로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는 전화·PCS·인터넷으로 분화하고 있지만, 21세기에는 고객이 한 회사를 통해 통합적인 서비스(one bill 시스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 기술은 10년 이내에 현재의 전화처럼 일상 생활에 스며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아이네트는 서비스 제공자의 처지가 아니라 소비자의 처지에서 21세기 종합정보통신 서비스 회사를 지향하고 있다.
웹진 발행인 주인석

사이버 잡지에 신세계 펼친 화려한 경력의‘문화 전도사’

극인·소설가·문화 평론가·잡지 편집자·웹진 발행인.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직함들이다. 연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통일밥> <불감증>, 그리고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주인석씨(35)의 최근 행보는 낯설다.

요즘 그의 일터는 인터넷 문화 잡지 <스폰지> (http:/www.sponge.co.kr)다.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놀림이 꽤 능숙하다.

이미 <이매진>이라는 문화 전문 월간지를 만들었던 그는 어느새 사이버 잡지 예찬론을 펼친다.그는 컴퓨터 마니아는 아니지만 인터넷이 열어준 사이버 공간의 효율성에 감탄하고 있다. ‘일반 잡지에 비해 제작비가 적게 들고 독자와 바로 소통할 수 있다. 판매·광고의 영향을 덜 받으며 정보를 축적하기도 쉽다. 독자는 잡지를 디딤돌 삼아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광고 수입도 기대할 만하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는 PC통신이 몇년 지나지 않아 대중화했듯이 인터넷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가 되면 제공하는 정보가 얼마나 충실한가에 웹진의 성패가 달린다.

각 문화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해온 팔방미인의 작품답게 <스폰지>는 알찬 문화 정보를 가득 담아낸다. 취재 기자가 작성한 기사뿐 아니라 평론가의 칼럼이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황지우의 <화엄 세상>, 김종엽의 <문화 평론>, 스폰지 갤러리와 성완경의 <미술 평론 코너> 등 고정 팬을 거느린 스타 평론가들이 포진해 문화론을 펼치는 것이다.

그는 “작가도 매력적인 일이지만 한 시대의 문화 의식을 짚어주는 잡지 편집자도 해볼 만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문화 계간지 <상상>과 <리뷰>, 월간지 <이매진>, 웹진 <스폰지>로 이어지는 잡지 편집 작업이 외도가 아님을 드러내는 말이다. 새로운 문제와 씨름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잡지는 더할 나위 없는 싸움터다.

91년 소설집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펴낸 이후 이후 창작이 뜸했던 그는 요즘 구상을 다듬고 있다. 주제는 연애·복수·죽음·유토피아다. 연애 이야기는 시나리오로, 죽음은 희곡으로, 복수와 유토피아를 다룬 이야기는 소설로 풀어볼 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이지 장르가 아니다”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구보씨의 행보는 앞으로도 종횡무진일 듯싶다.
웹 디자이너 정청운

‘세계화’ 배 타고 인터넷 바다에서 미래 예술 낚는 1세대 웹 아티스트

웹디자이너 정청운씨(29·아트스페이스 코리아)는 웹 디자인 1세대이다. 국내의 웹 디자인은 이제 고작 세 살이다. 96년부터 본격화한 것이다. 97년 ‘한국 인터넷 대전’에서 디자인 부문 대상을 수상한 그는 그동안 <호암 미술관> <코리아 인사이트>(공동 작업) 그리고 화장품 회사의 웹 사이트 등을 디자인했다. 웹 디자인의 3요소는 정보·기술력·디자인.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인터넷에서 호응을 얻는다.

대학 다닐 때부터 웹 디자인에 뛰어든 그는 디자인과 기술의 결합이 웹 디자인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인쇄 매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아직 인터넷 용량이 작지만 미세한 부분까지 디자인할 수 있는 것도 웹 디자인의 미덕이다. 그러나 이 매력 안에 어려움도 내장되어 있다. 인터넷 기술이 워낙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어서 늘 긴장하면서 변천하는 기술을 따라잡아야 한다.

웹진 디자인이 잡지 디자인이라면 웹 사이트 디자인은 전문 서적 디자인이다. 그가 공동으로 참여한 <코리아 인사이트>(http:/ /koreainsights.com)는 최초 화면이 뜰 때 징소리가 울려 나온다. 이 징소리와 함께 인터넷 가상 공간에 한국의 전통 문화가 ‘뜨는’ 것이다. ‘상생’과 ‘난장’으로 나뉘어 있는 <코리아 인사이트>는 한국의 사상과 종교, 문화 유산, 역사와 유적, 그리고 한국 고유의 선·색·상징·문양 등 한국의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의 시장·소리·몸짓·생활 문화·예인 등에 이르기까지 반만 년 문화를 인터넷의 바다에 띄우고 있다. 이 사이트는 한국 문화와 이미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사이버 문화 사절단’인 것이다.

웹 디자인 1세대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가 ‘용역’ 단계에 머물러 있는 웹 디자인 시장이다. 넓지 않은 시장에 수많은 웹 디자인 회사가 난립해 시장이 무질서하다. 외국처럼 인터넷을 통한 전자 상거래가 정착된다면, 이 문제는 많이 해결될 것이라고 정씨는 전망한다. 전자 상거래 수준에 오른다면 인터넷 광고 시장도 덩달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방송사나 신문사 웹사이트를 제외하면 광고가 거의 붙지 않는다. 한글 글자체도 적지 않은 문제다. 영문 글자체에 견주면 한글 글자체는 아름다움과 다양성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진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을 개척하고 있는 웹 디자인 1세대들. 이들이야말로 세계화 시대를 앞당기는 첨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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