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의 전통과 명예 잇는 종손들
  • 해남·보성·경주·안동/金在泰 기자 ()
  • 승인 199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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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의 전통과 명예 이어가는 종가 사람들의 삶
지난 8월30일, 토요일이었던 이 날 오후부터 고속도로는 몰려드는 차들로 몸살을 앓았다. 체증은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추석을 앞두고 조상의 묘를 벌초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은 주말 내내 전국에서 꼬리를 물었다. ‘민족 대이동’으로 표현되는 귀성 행렬의 예행 연습이었던 셈이다.

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불쑥 찾아온 올해 한가위 귀성 전쟁의 전초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런 고난을 연례 행사로 치르는 회사원 김형광씨(38·서울 거주)는, 추석 2주 전 주말이 으레 벌초 귀성의 대목임을 체험으로 알고 있던 터라 서둘러 집을 나섰지만 일찌감치 형성된 체증 터널을 무사 통과하지는 못했다. 남녘 끝 산골이 고향인 김씨는 평상시보다 5시간 넘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시간 초과는 추석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다가올 추석에 또 한차례 같은 일을 겪어야 하는 김씨는 벌써부터 앞일이 막막하다. 그렇다고 종손인 그로서는 그같은 고통을 회피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3년 전 직장 일 때문에 추석 벌초에 빠졌다가 문중 어른들로부터 ‘종손 노릇 제대로 못한다’고 혼쭐이 난 일도 있다.

이름 안부르고 ‘○씨 집안 종손’으로 불러

김씨에 비해 전남 순천시에 사는 정태환씨(30)는 종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건이 나은 편이다. 직장이 고향 가까이 있어 자주 찾아갈 수 있는 데다, 벌초도 동네 사람들이 때가 되면 잊지 않고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손의 책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온전한 그의 몫으로 남는다. 자기를 바라보는 집안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도 그렇고, 빈번히 돌아오는 명절·제삿날도 이제 갓 서른 줄에 든 그에게는 벅찬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터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정씨의 고향집은 그야말로 고대광실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유별하고 정원도 넉넉하다. 증조부가 축조해 90년 가까이 이어온 이 고택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정씨는 이름보다 ‘정씨 집안 종손’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릴 만큼 일찍부터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어렴풋이 종가의 가풍을 익히던 그가 처음 종손으로서 중압감을 느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정씨와 동생의 학업을 위해 어머니가 광주로 이사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알리자 문중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종가를 어떻게 비울 수 있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큰 도시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잘 되어서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로 설득해 떠나기는 했지만, 그 사건은 어린 정씨에게 종손의 막중한 역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정씨는 요즘 부쩍 자주 고향집을 찾는다. 5년 전, 종가에 들어와 살던 친척이 떠난 뒤로 줄곧 비어 있는 종택에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름으로 열심히 한다고 해도 힘에 부칠 때가 많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 자문하면 그때마다 자상하게 조언해 주지만 언제나 말끝은 똑같다. “다 니가 할 일이여.” 일찍 아버지를 여의면서 시작된 정씨의 ‘종손으로 홀로서기’는 아직도 진행형인 것이다.

제주(祭主) 노릇 하랴 종택 돌보랴 할일이 태산 같아 중압감이 크지만, 정씨에게는 그 못지 않게 훌륭한 집안의 종손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천석지기 옥답을 팔아 항일 투사들의 군자금을 대고 ‘양정원’이라는 사학을 세워 마을의 문맹 퇴치에 앞장섰던 조부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긍지이다.

스스로의 표현처럼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나이인 까닭에 정씨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종가의 전통을 이어가는 쪽이라면, 경주 최씨 사성공파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14대 손인 최채량씨(64)는 적극적으로 종가의 맥을 이어가는 경우이다. 최씨는 고등학교 교사로 서울·부산 등지에서 생활하다 7년 전 혼자 사시던 모친이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귀향을 결심했다. 때마침 고향인 경주군 내남면 이조리의 내남고등학교에 한문 선생 자리도 났다.

종택에 유물관 만들고 야학도 개설

지은 지 3백 년이 넘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99호로 지정받은 사랑채와 1백20년 가까이 된 고옥으로 이루어진 종택으로 돌아와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선조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무훈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는 69세 노구를 이끌고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남한산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진립 장군과 그 후대 조상들의 유품들을 수집해 사랑채 한쪽 방에 유물관을 차렸다. 도둑이 들어 일부가 망실되기는 했지만, 유물관에는 최진립 장군 사후 인조(仁祖)가 그를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정무라는 시호를 내려 보낸 교지(敎旨)며 목판 기록 같은 귀중한 사료들이 빼곡하다. 최씨는 내친 김에 선조들이 썼던 생활 도구들도 모아 사랑채 한쪽에 아담한 전시관을 마련했다. 종종 찾아오는 관람객을 위해 정무공의 무훈을 풀어 쓴 팜플렛도 만들어 놓았다. 요즘 최씨는 새로운 작업에 몰두해 있다. 한학에 밝았던 선친의 유고를 정리하는 일이다. 지금 세 번째 교정을 보고 있는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연말께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경주 최씨 집성촌인 고향 마을에서 최채량씨가 종손으로서 집안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몇년 전부터 유물관이 있는 사랑채의 빈 방에 야학을 열고 제도권 밖에서도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 매일 밤 8시부터 서예·한문·전통 예절을 주로 가르치는데, 이제는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멀리에서도 학생이 찾아올 만큼 규모가 커졌다.

최채량씨처럼 종가의 풍속을 현대의 흐름에 맞게 개척해 가는 종손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불천위(不遷位·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덕이 높은 인물로 그 후손이 영원히 사당에 모셔 제사 지내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 제사를 지내는 종가로서 집안의 유가적인 전통을 굳게 지켜가는 이른바 명문 종가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남 해남의 해남 윤씨와 경북 안동의 풍산 류씨 종가.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孤山)윤선도 집안의 종손으로 고산의 고택인 사적 167호‘녹우당(綠雨堂)’을 지키고 있는 윤형식씨(63)는 학창 시절 집안에서 모시는 제사 절차가 너무 복잡하게 느껴져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전통을 온전히 지켜가는 것이 자기 대 종손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여긴다. 수백 년 내려온 가례를 이제 와서 고치는 것은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아흔셋 고령임에도 제사 때 한 번도 빠짐 없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오시는 부친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대대로 유교 전통이 뿌리 깊게 이어져 온 경북 안동에는 유림의 본향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의성(義城) 김씨 내앞 종가, 의성 김씨 학봉(鶴峯) 종가,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 광산(光山) 김씨 예안파(禮安派) 종가 등 내로라 하는 명문 종가가 즐비하다. 하회 마을에 있는 풍산 류씨 종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14대 손으로 보물 414호인 종택 ‘충효당(忠孝堂)’을 지키고 있는 유영하씨(71)는 서울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 72년에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른 종가에 비해 가풍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아 종손이라는 부담감이 적었지만, 귀향한 이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1년에 두 차례씩인 시제(時祭)와 불천위 제사, 열 차례 기제(忌祭) 등 잇단 제사도 제사려니와 옛 종가들이 그랬듯이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 보니 격식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유씨는 요즘도 안동 부근 4개 군을 돌며 조상의 묘사(墓祀)를 빠짐 없이 지내는 등 종손의 주된 의무인 봉제사(奉祭祀)에 온힘을 쏟는다. 서애 선생 묘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택을 지키러 내려오겠다는 장남이나, 선조의 이름과 관작을 숙제로 내주면 척척 외어 오는 손자들을 보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씨족 사회 전통의 보루인 종가에는 가문의 상징이라는 영예만큼 그늘도 많다. 종손은 그 고통스러운 영광을 업보처럼 지닌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 가계를 이을 자손을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 봉제사·접빈객(接賓客)과 같은 전통적인 예의 범절을 전방위에서 떠맡아야 한다는 책무 따위 숱한 압박감이 그들의 생애를 짓누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후손을 보기 위해 씨받이를 얻는 비틀린 풍속의 주인공이 된 것도 종손이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종손들에게 정작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자기 세대에 힘들여 사수한 전통이 과연 후대에도 온전히 이어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적신호는 갈수록 많은 곳에서 빈번하게 켜지고 있다. 토지를 놓고 벌이는 종손과 문중 간의 법정 싸움, 종교 갈등으로 아예 없어지거나 변질하는 제사, 종손에게 시집가기를 꺼리는 신세대 여성의 결혼관, 종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문중 재산도 아낌없이 팔아치우는 배금주의. 암초는 수없이 많다.

고향 등지는 종손 점점 늘어

물신주의·개인주의와 더불어 종가의 위상이 최근 들어 더욱 거세게 흔들리고 있지만 그 현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종가의 위기는 이농으로 농경 사회의 기틀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징후를 드러냈다. 종가의 기반인 토지의 생산성이 확연하게 떨어진 이후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마지기 농토를 붙들고 남아 있던 종손들도, ‘빈손으로는 종손 노릇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논리를 앞세워 하나 둘 고향을 등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종손이라는 굴레 때문에 막차를 탄 것이 억울하다고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종가의 위기가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7년 전 종가를 비우고 부산에서 작은 식품 가게를 운영하다 지난해 고향 인근 도시로 이주한 김윤석씨(48) 같은 사람이 점차 늘어난다면 종가는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지난 8월31일에도 예년처럼 집안 벌초를 주도한 김씨는 “무엇보다 자주 고향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종손으로서 남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으면 반드시 종택에 들어가 살겠다”라고 말한다.

제사가 약식화하고 전래의 종가 전통이 퇴색하는 현상을 두고도 꼭 비관적인 견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균관 전례연구위원회 권오흥 연구위원은 “세태가 변하면서 제사 문화의 본질이 흐려지고 미풍 양속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는 지금의 아버지 세대가 건재하고 여러 곳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높은 만큼 언젠가는 전통이 복원될 것이다”라고 희망적으로 내다보았다. 이남식 교수(안동대·민속학) 역시 아버지 세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젊은 시절 가문 일에 무관심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어 정년 퇴직하거나 시간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고향을 찾게 되고 제사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가끔 목격한다”라고 이교수는 말했다.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를 겪으면서 영예보다 더 많은 짐을 떠안은 채 힘겹게 정보화 사회의 격랑을 맞고 있는 한국의 종손. 그들이 정체성을 확보하고 씨족 사회의 중심으로 다시 우뚝 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결국 가계의 세부 단위인 가족 사회의 건강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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