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역사책' 용늪의 원시 숨결 되찾기
  • 안은주 기자(anjoo@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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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 2005년까지 출입금지령 ··· 군부대 이전 심사숙고
지난 7월18일 일부 언론이 국방부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있는 용늪 보전을 위해 인근 군부대를 옮길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용늪의 상류에 위치한 군부대가 배출하는 오폐수가 용늪을 훼손한다는 환경부의 건의 때문이었다. 국가 안보를 제일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도 환경 논리가 국방 논리에 우선할 수 있다는 보도여서 일반 국민은 물론 환경 단체들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국방부 관계자에게 사실을 확인한 결과 ‘논의중’이라며 확답을 보류했다. 늪 보전을 위해 군부대를 옮겨야 하지만, 해당 부대가 ‘군 작전상 중요한 지역이어서 이전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환경 문제 때문에 군 작전을 변경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만큼은 피했다.

환경부는 올해 말까지 정해 놓은 용늪 출입금지령을 앞으로 5년 더 연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용늪 보전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출입하던 연구자들의 발길조차 제한할 방침이다. 환경부는 늪 전체가 연구자의 발길에 손상되지 않도록 일정한 지역에 목도(木道)를 만들고 있다(78쪽 인터뷰 기사 참조).

용늪은 1967년 일반에 알려진 이래 1989년 자연생태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고층 습원(高層濕原)이다. 1997년 한국이 람사협약(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보호 협약)에 가입하면서 보호 습지 1호로 등록한 곳이기도 하다.
고층 습원이란 아한대의 평원이나 온대의 고산지방 등 여름 기온이 낮고 배수가 잘 되지 않은 토지에서 나타난다. 식물체가 완전히 분해하지 않고 퇴적되어 적갈색 이탄층(썩지 않은 식물이 퇴적한 층)이 형성된 습지이다.

이같은 고층 습원의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용늪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생태계 보고이다. 겉보기에는 버려진 땅처럼 잡초만 우거져 초라하지만 한반도 자연 환경의 4천5백년 변화를 켜켜이 간직한 ‘살아 있는 생태 역사책’이다. 용늪은 물이끼·끈끈이주걱 등 특이 식물이 얼어 죽어 완전히 썩지 않은 채 해마다 1mm씩 쌓이며 이탄층을 형성해 왔다. 현재 형성된 이탄층 두께는 23~180cm. 최기룡 교수(울산대학·생물학)는 “이탄층 속에는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식물의 꽃가루도 있어 멸종된 식물 종을 알아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라고 설명한다.
4천5백년 자연사 간직한 ‘희귀 동·식물 보고’

용늪이 고층 습원의 특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10∼4월이 영하의 기온을 유지하고 한여름에도 16도를 넘지 않는 기후 때문이다. 또한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의 영향으로 안개가 끼는 날이 연간 1백70일에 달해 습원 식물이 잘 자란다.

용늪에는 희귀 식물 16종을 포함해 식물 2백여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두산 이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비로용담, 금강산 이북과 지리산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도깨비엉겅퀴, 곤충을 잡아먹는 식충성 식물인 끈끈이주걱이 대표적이다. 또 환경부 생태조사단에 따르면 식물뿐 아니라 수서곤충을 비롯한 동물 생태 또한 특이해서 학술 가치가 매우 높다.

용늪이 학계에 처음 알려진 1967년만 해도 용늪은 고층 습원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77년 용늪 중앙에 군부대 스케이트장이 조성되는 바람에 용늪의 지하 수위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이탄층이 마르면서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이 침입하기 시작했고, 용늪은 고층 습원의 모습을 차츰 잃어 갔다. 또 용늪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한 군부대가 날로 시설을 늘리고, 새로운 도로를 닦으면서 용늪을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실제로 큰 용늪에서 40m 떨어진 곳에 형성되었던 작은 용늪이 도로를 건설할 때 유입된 토사로 인해 수풀이 우거진 ‘땅’으로 변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학술 조사와 매스컴의 취재, 마을 주민의 나물 채취 등으로 짓밟히면서 늪지 표면은 점점 굳어 갔다.

특히 최근에는 용늪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진퍼리새 군락이 발견되어 학계에서는 한시바삐 용늪의 건조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상준 교수(충북대·과학교육)는 “진퍼리새 군락은 고층 습원에서 중간 습원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용늪의 변화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인간 활동으로 인해 용늪이 말라가는 것을 빨리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환경부는 1996년부터 해마다 조사와 연구를 거듭하고, 현재 용늪 보전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생태과 안종운 사무관은 “지하 수문 환경에 대한 정밀 측정이 끝나는 올 가을이면 구체적인 보전 대책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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