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포로 양순용, 45년 만의 북한 탈출 드라마
  • 경남 함양·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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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양순용씨, 북한 대탈출 ‘기적의 드라마’
모든 것은 느닷없이 날아든 편지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신인 난에는 양병용씨(62)의 세 형제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발신인 난에는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 온 편지였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45년 전 고향 주소를 정확히 외우고 있었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그러나 45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동생들이 모두 옛집에 살아 있으리라고 확신하기에는 너무나 길었다. 그래서 그는 편지 봉투에 동생 3명의 이름을 모두 써 넣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편지를 읽어 달라는 피맺힌 소원이 담긴 서한이었다.

95년 2월. 대탈출을 감행하기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40년 가까운 탄광 노동으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육체일망정 조국에 묻고 싶었다. 북한에서 결혼해 자식을 여섯이나 둘 때까지 이 생각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북한 식량난이 기아 상황으로 치달을 무렵인 95년, 평소 알고 지내던 중국의 조선족을 통해 한국으로 자신의 사연을 담아 편지를 띄웠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가족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3년 만인 지난해 12월24일 그가 서해안을 통해 45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김으로써 이 대탈출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실낱 같은 희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양순용(71). 군번 9288605. 육군 제8사단 21연대 소속 일병. 그는 지금까지 국립 묘지에 묻혀 있었다. 국립 현충원 현충탑과 컴컴한 위패봉안관 한쪽 구석에 있는 10만개가 넘는 위패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살아 돌아왔다. 가족들은 사망 날짜도 알 수 없는 그를 생각하며 40년 넘게 제사를 지내 왔다. 순용씨를 포함해 두 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어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광복장까지 받았던 순용씨의 아버지 양재민씨는 20여 년 전 임종 직전에도 “순용아, 순용아” 목놓아 부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역시 아들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손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양씨의 귀환은 94년 조창호 소위가 43년 만에 중국을 거쳐 귀환한 지 3년여 만에 이루어진 국군 포로의 두 번째 안착이다. 더구나 참전 당시 두 딸까지 두었던 양씨의 본처 박옥임씨(71)와 동생 병용(62)·원용(59) 씨가 현재 고향인 경남 함양에 모두 살아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또한 양씨의 부인 박옥임씨가 임재문 국군기무사령관의 이종사촌이므로 양씨는 임사령관의 사돈이 되는 셈이다
아오지 탄광에서 40년 동안 막장 노동

양씨는 지난해 12월24일 입국한 이후 현재 정부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정부는 양씨가 입국한 지 6일 만인 지난해 12월30일 그가 8사단 소속 국군 포로라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양씨는 52년 입대해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뒤 전장에 투입되었다가 53년 강원도 금성지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함경북도 은덕군에 있는 일명 아오지 탄광에서 근 40년 동안 막장 노동에 시달려 진폐증 증세를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입국 후 정밀 건강 검진을 받았으며, 관계 기관으로부터 북한 생활 등에 관해 상세한 조사를 받고 있다. 국방부도 양씨가 국군 포로라는 사실이 공식 확인됨에 따라 그의 신분과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이 일이 끝나면 정부는 양씨의 공식 기자 회견을 통해 귀환 경위와 북한 생활 등에 관해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두 자식 잃은 부인 박옥임씨의 ‘한 많은 삶’

양순용씨의 귀환 소식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고향의 가족이다. 95년 당시, 국립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양씨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이 사실을 믿은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부인 박옥임씨는 “누군가의 장난이려니 했다”라고 말했고 동생 병용씨는“6·25 때 실종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사람들이 있다더니…”라고 말했다.

이 편지를 보내온 조선족은 ‘북한에 사는 양순용씨의 동생들이 살아 있는지 궁금하다’고만 밝히고 ‘편지를 받을 수 있다면 소식이라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살아 있더라도 북에 있는 형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북한에 있는 순용씨의 안전을 위한 조처였다.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 가족들은 당황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지만 뾰족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설마 하면서도 일단 편지를 띄운 당사자에게 답장을 보내 보자고 결정했다. 양씨의 부인을 포함한 동생들 사진도 동봉했다. 이렇게 해서 편지가 한 차례 오갔다.

그런데 몇 달 뒤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보내온 답장을 읽고는 양씨의 생존 소식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 중개자인 조선족이 북한에 들어가 양씨를 만나고 온 뒤 보낸 편지에는 부인 박옥임씨의 이름과 딸 양춘자씨(60년 사망)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양순용씨는 이 편지에서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어‘내가 입대할 때 겨우 기어다니던 딸 춘자’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양씨가 입대하기 전 춘자씨가 태어났고 52년 입대 당시 부인 박씨의 뱃속에는 둘째딸 임선씨가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춘자씨는 60년께 일본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복자인 둘째딸 임선씨도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남편 양씨가 참전했다가 전사 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온 뒤 미망인 박옥임씨의 삶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두 딸을 졸지에 잃은 것은 물론이고,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뒤 그 날로 몸져 누워 버린 시어머니의 병수발도 박씨의 몫이었다. 양순용씨의 어머니는 맏아들 순용씨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 택용씨까지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아들고는 그 날 이후 문 밖으로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했다. 그리고서는 69년 눈을 감을 때까지 꼬박 16년간 박씨가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박씨의 한 많은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머지 않아 시아버지에게도 노망기가 찾아 들었다. 박씨는 몸져 누운 시부모를 모시고 두 시동생을 함께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전사한 남편의 제사마저 부모의 눈을 피해 몰래 지내야 했다. 두 아들의 전사 소식에 중병을 얻은 시부모의 병세를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박씨는 모든 것을 지극히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시동생 병용씨는 “형수가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가족, 3년간 피 말리는 생활

양순용씨의 바로 밑 동생인 병용씨는 형이 죽었다고 알면서도 지금까지 형이 남긴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60여 년 전 당시 수동공립보통학교 통신표에서부터 두 형의 전사 통지서, 한국전 발발 직후 제주도 훈련소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그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다. 모두 흙빛에 가깝도록 빛깔이 바랜 채 네 귀퉁이가 너덜너덜하게 닳아 해진 것들이었다. 형의 생환 소식을 접한 병용씨는 “형의 군번을 지금까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전사한 형의 유품을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지금까지 간직해 왔는데, 이런 날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양순용씨는 일제 시대에도 징용에 끌려갔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터진 후 입대하기 전에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양씨가 징용될 당시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강제 동원되기에는 어린 나이였으나 4형제의 맏아들인 그는 징용을 자원했다. 아버지가 징용에 나갈 경우 집안을 누가 책임지겠냐며 아버지 대신 나선 것이다. 양씨의 4형제 중 막내인 원용씨는 “징용에 끌려가면 당연히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형님은 그만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매우 강했다. 차 타는 곳까지 따라나가 땅을 치며 통곡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라고 말했다.

양순용씨가 북한의 가족을 등지고 한국행을 결심한 데는 대단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95년 중국의 조선족을 통해 부인 박옥임씨와 동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받았을 때, 양씨는 그것을 그 자리에서 찢어서 땅에 파묻어 버렸다고 한다. 또 한국에서 중국을 통해 보내 준 와이셔츠 등 옷가지도 전혀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사형당할 것이 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45년 동안 고향의 주소를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며 탈출을 꿈꾸어 왔을 양씨가 얼마나 신중하게 대탈출을 준비해 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의 탈출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양씨가 한국의 가족이 모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흥분했다”라고 전했다.

양씨의 한국행은 3년 동안 온 가족이 피를 말리는 조바심 속에서 기울여온 끈질긴 노력의 대가였다. 장기간 막장 노동으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형님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라도 고향에서 보내게 하고자 했던 양씨의 동생들은 형님을 상봉할 날만 기다리며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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