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깊은 절망과 배신감
  • 중국·베트남/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1.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정부가 지뢰밭으로 추방한 탈북 난민 8인의 ‘생존 일기’
무려 7개월에 걸쳐 아시아 대륙 3개국을 가로지르는 장장 7천㎞에 이르는 대탈출 끝에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들어간 탈북 난민 13명의 비극적 사연이 공개된 때는 97년 12월2일이었다. 전국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대서 특필했다. 당황한 외무부는 뒤늦게 외교 노력을 기울여 지뢰밭 추방을 면한 강경호씨 일가족 4명과 추방된 9명 중 대사관으로 되돌아온 차도수씨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대사관에서 보호받다가 베트남 정부에 넘겨진 뒤, 국경 인근에서 양국 군대에 붙잡혀 핑퐁 게임 식으로 떠넘겨진 끝에 지뢰밭으로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8명은, 비극적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상태에서 이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뢰밭에서 실종된 탈북 난민 8명의 목숨은 질겼다. 굶어 죽은 가족의 사연을 북한에 묻고 오로지 모진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이들의 정신력은 죽음도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다. <시사저널>은 97년 12월2일 배포된 제424호에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의 직무 유기가 이들 탈북 난민을 지뢰밭으로 내몰았다는 내용을 보도한 이후 그들의 생사 여부를 추적해 왔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97년 12월24일 이들이 기적처럼 살아서 베트남 국경 근처 소도시들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자는 그들의 은신처로 잠입해 들어갔다.

베트남 국경 근처 3개 도시에 2∼3명씩 흩어져 음침한 골방에서 신음하는 그들은 이제 단순한 탈북 난민이 아니었다. 한국대사관에서 19일간 보호받았다는 엄청난 ‘죄목’이 추가된, 북한 보위부의 표적들이었다. 제3국을 전전하면서 그나마 유지했던 ‘불안한 자유’마저 빼앗긴 이들이 지금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동포애 덕분이었다. 한국 정부가 비정하게 잘라버린 동포애를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과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분담해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베트남 관리는 온정 베풀었는데…”

생존한 난민 8명은 유ㅇ옥(여·48) 김ㅇ일(17) 김ㅇ일(16) 세 모자와 최ㅇ룡(28) 송ㅇ성(26·임신 6개월) 부부, 그리고 김ㅇ철(24) 조ㅇ국(34) 홍ㅇ실(여·36)씨 등이다. 이제는 제3국에서조차 거리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된 이들이 기자를 만나 처음 털어놓은 것은 말이 아니라 북받치는 설움이었다. 설움을 겨우 추스른 그들은 지금도 악몽으로 되살아난다는 지뢰밭 추방과 그 이후의 기적 같은 생존 과정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똬리를 튼 코브라에 물려 쓰러지며 지뢰가 폭발해 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북한 특무 요원에게 붙잡혀 손발이 잘려나가는 내용으로 뒤범벅이 된 이들의 꿈 이야기는, 대부분 한국대사관에서 버림받은 뒤 겪은 현실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

당초 생사고락을 함께한 탈북 난민 13명 중 5명만 서울에 들어오고, 나머지 8명이 죽음의 수렁에 더 깊숙이 빠져들게 된 운명의 장난은 한국대사관에서 시작되었다. 97년 10월20일 7천㎞에 이르는 죽음의 탈출 작전 끝에 하노이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들어간 13명은 대사관에서 조사받은 후 곧바로 보호 생활에 들어갔다. 19일 동안 대사관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11월9일 대사관측의 안내로 베트남 내무부에 인계되었다. 대사관 직원은 이들에게 조사가 끝난 뒤 방을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내무부에서 조사받은 뒤 이들은 버스에 올랐다. 13명 가운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김옥란씨 가족 3명(강경호·강 림·강 민)은 병원에 데려간다며 빼냈다. 버스에 오른 이들은 숙소를 옮기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는 하노이 시내를 빠져나갔다. 한동안 이들 사이에서는 하노이 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말들이 오갔다. 그러나 차가 백여㎞를 달리면서 불안이 엄습했다. 이들을 인솔한 베트남 내무부 책임자와 중국어로 유일하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유ㅇ옥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날 저녁 국경 도시 랑손의 호텔에서 우리를 하룻밤 재운 내무부 관리는 11월10일 아침 국경으로 싣고 가더니 ‘당신들 문제는 어제 하노이에서 한국과 베트남 간에 결정이 났다. 베트남 정부는 당신들이 한국에 가든 북조선에 가든 아무 상관이 없지만 한국 정부가 안받겠다고 했다. 어제 저녁에 추방해도 문제삼지 않겠느냐고 랑손 호텔에서 한국대사관에 마지막으로 물었더니 베트남 결심대로 하라고 했다. 재난민인 당신들을 차마 북조선대사관으로 보낼 수는 없어 추방하니 떠나라’고 말했다. 우리는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매달렸지만, 그가 중국돈 50위안씩 나눠주고는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밀어냈다.”

이후 이틀에 걸쳐 이들은 중국군과 베트남군 사이에 핑퐁 식으로 떠넘겨지기를 두 차례. 추방에 실패한 베트남측은 97년 11월12일 이들을 다시 국경 도시 랑손의 호텔로 데려갔다. 이때 하노이에서 내무부 관리가 나타났다. 그 관리는 내무부에서 조사받을 때 촬영한 13명의 사진과 조사기록을 모두 가져와서 한국대사관과 재협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난민측 통역을 맡았던 유ㅇ옥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두 번째로 온 베트남 관리는 얼마나 고생스러운가고 묻더니 ‘현재 북조선 상황이 매우 어려워 우리도 쌀을 지원했다. 당신네 같은 난민은 한국 정부가 응당 데려가야 하지만 어제 협상에서는 한국 정부가 안 받겠으니 베트남 결정대로 하라면서 철수해 버려 추방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한국과 북조선이 적대 관계라는 데 있다’라고 했다.” 그 관리는 이어서 한국대사관과 베트남 정부의 상급자에게 추방 실패 사실을 전하고 재협상하도록 건의할 테니 기다리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미 양국군 사이를 왔다갔다 한 난민들은 불안한 나머지 식사도 못하고 탈진해 있었다. 베트남 관리는 이에 대해서도 ‘식사를 하지 않고 지쳐 쓰러져 있으면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데리러 올 때 마음이 좋겠는가. 우리는 한국과 우호 관계이니 모든 노력을 다해 당신들을 위험에서 구해주도록 하겠다. 오후 4시까지 한국대사관에서 답변이 올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한 베트남 관리가 나타나기 전인 오후 2시께 군인들에 의해 다시 추방되고야 말았다. 베트남 관리가 거짓말을 했는지 한국대사관측이 재차 안 받겠다고 버텼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탈북 난민 8명은 한국대사관이 자기들을 최종적으로 버렸으리라고 믿고 있다. 거기에는 추방 당시 베트남 정부 관리와 한국대사관이 이들 난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홍ㅇ실씨는 “우리는 비록 추방당했지만 베트남 정부 관리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당신들 이런 옷 입고 얼마나 고생스럽냐’고 동정도 해주고 돈도 50위안씩 나눠주면서, 자기 동포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 한국대사관이 안타깝다는 말을 한 것이 위선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대사관측은 우리에게 한국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짧은 여름옷 그대로 여비도 한푼 주지 않은 채 슬그머니 빠져나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한국 정부를 원망할 겨를도 없었다. 중국측으로 떠밀린 뒤 중국군에게 잡히면 북한대사관에 넘겨져 죽는다는 절박감 때문에 뿔뿔이 지뢰밭으로 흩어져 들어가기 바빴다. 그 중 홍ㅇ실씨는 중국군에 붙잡혔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해 일찌감치 제3국에 은신한 뒤 한국으로 전화해 생존이 확인된 경우이다. 또 차도수씨는 5일 동안 베트남 내륙 쪽으로 걸어가 11월18일 천신만고 끝에 한국대사관으로 되돌아갔다. 차씨는 이 사건이 국내에서 문제가 된 뒤 외무부의 노력으로 12월24일 귀국했다.

‘마귀산’ 기어오른 피투성이 임산부

그러나 나머지 난민들에게는 추방 직후부터 이루 형언하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지뢰밭으로 들어간 뒤 철조망에 붙어 있는 지뢰 표지판을 보고 더 전진하지 못한 채 엎드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밤이 이슥해지자 베트남·중국 국경 사이에 있는 마을에 불빛이 보였다. 군용 도로를 따라 외딴집으로 찾아들어간 이들은 마침 추방 당시 소지했던 간장 2병과 콩기름 1병을 집주인에게 건네고 양국 군대에게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소연했다. 중국어 통역을 담당했던 유ㅇ옥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근처가 모두 지뢰밭이라 군인들이 지키는 길 외에는 갈 수가 없지만, 30년 전 자기가 어렸을 때 다녔다는 길을 알려줬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면 가시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그 산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 4개를 넘으면 군대의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일행 7명은 자정쯤 그 집을 출발해 절벽을 기어올랐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서 그곳만 지뢰가 묻히지 않았다. 간신히 절벽을 오른 이들은 바위더미와 가시나무로 이루어진 깎아지른 듯한 화강암 바위산을 필사적으로 올랐다. 모두들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아랑곳할 처지가 아니었다. 해발 1500m인 바위산을 타고 넘기를 이틀간 계속해야 했다. 산기슭은 늪지여서 접근할 수 없었고, 가는 길마다 코브라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곤 했다.

지뢰밭을 피해 바위산으로 탈출하던 과정을 김ㅇ일군은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동화에서 본 마귀산이 바로 그 산이었다는 생각이다. 목숨이 질겨서 살았다는 말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가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도저히 갈 수 없어 군대조차도 천연 방패로 여기고 지뢰를 묻어두지 않은 곳을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기적같이 넘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임신 5개월인 송ㅇ성씨도 이 행렬에 끼어 있었다는 점이다. 송씨는 “산을 넘을 때 내내 배가 딱딱해 있어 애가 죽은 줄 알았다. 애를 낳아본 언니들이 배를 만져보고는 ‘괜찮다. 이런 고생을 할수록 뱃속 애는 더 질긴 목숨이 된다’고 위로해줘서 힘을 냈다”라고 말한다.

97년 11월15일께 이들은 마침내 ‘마귀산’을 벗어났다. 그러나 짧은 여름옷은 다 찢어지고, 온몸이 피딱지 범벅이었다. 그러나 흉칙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바로 공안에 신고할 것이 두려웠다. 결국 이들은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큰 찻길을 따라 걷는 식으로 2백㎞ 떨어진 국경 도시로 향했다고 한다. 식사는 사탕수수밭에 들어가 해결했다. 5일 동안 사탕수수만 씹으며 낮에는 사람 눈을 피해 숲에서 자고 밤에만 걸어 한 도시에 도착했다. 이들이 큰 도시를 목표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옥씨는 “큰 도시에는 한국 기업이 있을 테니 만나서 찢어진 옷이라도 갈아입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국에 알릴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한국인을 만나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때 완전히 거지 행세를 함으로써 의심을 피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3일 동안 한국인을 찾아 도시를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국인은 만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이들 사이에서는 차츰 다른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러다 언젠가 북한 체포 요원에게 발각되면 참형을 면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북한대사관에 찾아가 자수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격론을 벌인 끝에 그런 일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한국인도 북한인도 만나기 힘든 산간 마을로 들어가 추수일이나 도와주고 목숨을 부지하자는 제안이 또 나왔다. 도시에서 몰려다니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행동이라는 판단에서 모두가 동의했다.

11월20일부터 약 보름 동안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속 마을을 헤매며 일을 해주고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나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중국 남방의 변경 지대에서 그런 행각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추워지면서 이들에게는 더 따뜻한 곳을 찾아야 살 수 있다는 동물적 본능이 발동했다.

12월 초순 중국 동남쪽 최남단 도시로 찾아간 이들은 마침 그곳에서 목회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의 사연을 들은 선교사는 즉시 이들이 한국대사관에 들어가기까지 생사를 같이했던 서울의 통일강냉이모임에 연락했다. 아울러 8명의 안전을 위해 현지 한국 기업인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분산해 은닉시켰다. 이로써 지뢰밭에서 실종된 후 생사불명 상태에 빠졌던 탈북 난민 8명은 97년 12월4~15일에 전원 생존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굶주림 모르는 한국 소년들에게 바치는 삽화

기자가 이들의 은신 현장을 방문한 날은, 이들과 함께 지뢰밭으로 추방되었다가 혼자서 다시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차도수씨가 서울로 들어간 날이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저마다 한국을 향해 절박한 마음으로 구원을 바라고 있다. 국군 포로 아들로 국내에 친척이 있는 최○룡씨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죽음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김○일군(17)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앞으로, 구명 약속을 저버린 한국 정부를 원망하며 믿을 수 있는 구명 조처를 취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특히 은신처에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틈을 이용해 사춘기 소년이 겪고 있는 민족 비극의 대드라마를 삽화를 곁들여 꼼꼼히 완성했다. 한국 정부에 버림받아 17년 짧은 생을 이국 땅에서 마감할지라도 이 작품을 배를 곯아보지 않은 한국 소년들에게 바치고 싶다는 김군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 작품을 기자에게 건넸다(오른쪽 글·삽화 참조).

지뢰밭으로 추방된 뒤 생존이 확인된 이들은, 현재 한국 정부에 대한 절망과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다.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숨겨주고 있는 한국인들은 누가 보호해야 하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