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에너지 '뇌파' 개발 현주소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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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파 활용한 감성 공학·첨단 통신 연구 활발… “뇌 지배하는 자가 세계 지배할 것”
 
사람의 뇌에 전류가 흐른다고 말했던 영국 의사는 미치광이 취급을 당했다. 겨우 백년 전 얘기다. 오늘날 뇌에서 전류(뇌파)가 끊긴 상태란 곧 죽음(뇌사)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일반인에게도 상식이다.

뇌에는 수백억개에 이르는 신경 세포가 있다. 전류는 이 세포 사이에 돌기가 나와 신경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전류를 재기는 쉽지 않다. 뇌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수액·두개골·두피 따위를 통과하면서 세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대뇌피질 표면에서 전류를 재면 훨씬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지만 뇌를 다친 환자가 아니면 이 방법은 쓸 수가 없다. 그래도 두피 어느 부위에나 전극을 갖다 대면 5백만분의 1∼5천만분의 1 V 전압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최대한 증폭시켜 기록한 것이 바로 뇌파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뇌파에 대한 연구는 눈부시게 진전했다. 초창기 연구를 주도한 것은 의학계였다. 29년 뇌파를 측정하는 데 처음 성공한 독일 신경학자 한스 베르거는 편히 쉴 때와 머리를 쓸 때 주파수와 진폭이 다른 뇌파가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베르거는 여기에 각각 알파(α)파와 베타(β)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 베르거의 후예들은 이 두 가지 외에도 여러 파형이 있음을 밝혀냈다. 현재까지 발견된 뇌파는 대략 일곱 가지이다(96쪽 상자 기사 참조). 오늘날 뇌파는 병원에서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검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항목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공학 분야에서 뇌파를 응용해 보려는 시도가 부쩍 늘고 있다. 흐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뇌파 측정 데이터를 제품 설계에 이용하려는 감성 공학 쪽의 흐름이다.

 
감성 공학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감성을 중심에 놓는 공학적인 접근 방식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소비자들은 ‘튼튼하다’ ‘값싸다’처럼 기능·품질·가격을 따지기보다는 ‘멋있다’ ‘고급스러워 보인다’처럼 감각과 지각을 최우선에 놓고 판단하게 된다. 선진국들이 80년대부터 감성 공학 기술을 발전시켜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에 감성 공학이 처음 소개된 것은 91년. 그러나 성장 속도가 빨라 올 한 해 국내 가전제품 시장의 감성 공학 기술 수요만도 1조7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가전업체들이 관련 기술 개발에 앞장서고 있으며, 정부도 감성 공학의 뒷받침 없이는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진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고 지난해 말 감성 공학 기술을 G7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감성 공학에서는 인간의 감성을 어떻게 정확하게 읽어내느냐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자동차에 새로 개발한 시트를 얹으려면 소비자들의 반응을 미리 알아 보아야 한다. 감성 공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설문 조사가 이 작업의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꽤 편안하다’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다’와 같은 답변은 설계자와 기업주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꽤’‘약간’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성 공학은 애매모호한 부사와 형용사로 표현되는 인간의 감성을 수치화·계량화하려 시도한다.
‘불 켜져라’ 생각만 하면 전등 반짝

이를 위해 가장 기초적이고도 핵심적인 수단이 뇌파를 측정하는 것이다. 자동차 시트에 앉은 피실험자의 머리에 전극을 연결한다. 뇌파 전위 기록 장치(EEG)에 뇌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전극이다. 시트가 쾌적하면 피실험자의 뇌파 가운데 알파파가 증가한다. 불편하면 알파파가 감소한다. 마찬가지로 소리·빛·냄새로 인간의 다섯 감각(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을 자극하면 뇌파에 변동이 생긴다. 그 자극이 마음에 들면(긍정 자극) 알파파가 증가하고, 불쾌하면(부정 자극) 감소한다. 이를 이용해 감성 데이터를 정량화하는 것이다. G7 프로젝트의 감성 공학 기술 부문을 주관하고 있는 표준과학연구원 박세진 인간공학연구팀장은, 뇌파가 심전도·얼굴 근전도·피부 저항도와 함께 감성을 측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라며, 이를 얼마나 더 정밀하게 측정하고, 감성과의 상관 관계를 정확히 수치로 밝혀낼 수 있느냐가 감성 공학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우리와 달리 외국의 감성 공학 기술은 인간과 기계의 교감(MMI:Man-Machine Interface)이나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 작용(MCI:Man-Computer Interaction)을 꿈꾸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을 기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사람에 맞추는 기술이 그것이다. 음성 인식 컴퓨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말을 하거나 손짓을 하는 대신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계나 컴퓨터를 제어하려는 연구가 속속 진행되고 있다. 뇌파가 일종의 전기 신호라는 데 착안한 연구들이다. 감성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뇌파를 이용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간 공학적 응용인 셈이다.

지난 8월15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시드니 무역관은 호주의 공학 시스템 회사인 UTS(유니버설 테크니컬 시스템스) 연구팀이 뇌파를 이용해 전등이나 텔레비전을 작동하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따로 훈련 받지 않은 일반인 1백20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95%가 스위치 작동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피실험자는 눈을 감고 ‘꺼져라’‘켜져라’ 마음 속으로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머리에 연결된 전선이 이때 나타나는 독특한 뇌파를 포착해 파워 박스를 통해 증폭시킴으로써 유·무선으로 연결된 전자 제품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애플컴퓨터사의 지원을 받고 있는 미국의 중소 업체 IBVA 또한 최근 뇌파로 오디오를 작동하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해도 기술은 간단치 않다. 뇌파를 기계 작동에 응용해 보려는 발상은 몇 년 전부터 있어 왔다. 국내에서도 93년 현대자동차가 이와 관련한 특허를 출원해 특허청이 지난해부터 심사에 착수한 상태이다. 뇌파를 이용한 △브레이크 자동 제어 장치 △응급 신호 자동 송신 시스템 △카 오디오 자동 제어 장치 등이 그것이다. 몇 초 사이에 사느냐 죽느냐가 판가름나는 것이 교통 사고의 특성이다. 따라서 오감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가 분석해 판단하고, 이를 다시 신경계에 명령해 근육을 움직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켜 보자는 것이 뇌파를 이용한 브레이크 자동 제어 장치의 기본 발상이다. 그러나 연구에 참여한 관계자는 ‘2000년대에나 실용화할 기술’이라고 전망한다. 우선은 각종 돌발 사태마다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 풍부한 데이터가 축적되어야 하고, 또 그 상황에 맞게 제동 횟수·세기·방법도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명령을 내리는 방법은 훨씬 복잡하다. 우선은 어떤 명령어를 떠올릴 때 뇌의 어떤 부위에서 어떤 형태의 뇌파가 발생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이 분야 연구에 가장 앞선 나라는 일본이다. 92년 일본 후지쓰사와 홋카이도 대학 전자연구소 공동팀은 ‘아’라는 모음을 머리 속에 생각했을 때 약 0.42초 뒤 뇌의 앞 부위에서 강한 뇌파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 와타나베 교수 등은 일본어의 다섯 가지 모음(아·이·우·에·오)을 식별하는 연구에서 더 진전된 성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유효 식별률은 아직 25% 안팎을 넘나드는 데 머무른다.
초보적이나마 이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한켠에서는 뇌파가 미래의 유력한 통신 수단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정보분석실 김정환 연구원은 ‘모음 수준을 넘어 자음·단음절·단어·문장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되면 언어 장애나 청각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뇌파 인식 장치와 음성 합성 장치를 결합하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말로 전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뇌파는 주변의 잡스러운 소리에 영향 받지 않고(내음향 잡음성), 외부에 소음을 발생하지도 않으며(정숙성), 비밀이 필요한 내용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므로(비화성) 그 무엇보다 우수한 통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서울대 뉴미디어통신 공동연구소가 최근 연구하기 시작한 ‘염파를 통한 우주 통신’이다. 흔히 텔레파시라 부르는 염파(念波)는 무엇엔가 골똘히 집중할 때 나오는 뇌파의 일종이다. 단 30Hz 이하 저주파인 뇌파와 달리 염파는 초고주파보다 주파수가 높아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한다. 따라서 염파야말로 우주 통신 시대에 전파를 대체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라고 연구소장 이충웅 교수는 강조한다(오른쪽 인터뷰 기사 참조).
 

물론 뇌파를 이용한 간단한 기계 장치마저 실용화하지 않은 현실에서 이같은 주장을 비현실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실용화한다 해도 당분간은 신체 장애자를 보조하는 수준에 그치게 될 수도 있다. 뇌파 신호를 보내기 위해 머리에 계속 띠를 두르고 있어야 하는 불편함을 참아낼 일반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DOS·윈도 지나 MOS 시대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같은 연구가 기계 중심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IBVA사는 현재의 컴퓨터 운영 체제(OS)에 빗대 “21세기의 주도적인 운영 체제는 정신 운영 체제(MOS:Mind Operating System)가 될 것이며, 이미 그 시대는 시작됐다”라고 선언했다. 정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같은 선언은 동양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특히 ‘기(氣)’의 개념을 갖고 있는 동양 문화권에서 ‘몸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뇌파)’를 조절하고 이용한다는 발상은 낯설지가 않다.

미래학자들은 뇌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미국 상하 양원 101차 합동회의에서 부시 대통령이 ‘뇌의 10년(Decade of Brain; 1990∼2000)’ 법안에 서명함으써 미국은 뇌 기능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일본 과학기술청 또한 앞으로 20년간 뇌 연구에 2조엔을 쏟아붓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이런 추세라면 외경스럽게만 여겨지던 인간의 뇌는 다음 세기쯤 그 비밀을 상당 부분 드러낼 전망이다. 뇌파를 응용한 최근의 실험은 앞으로 드러날 비밀이 미래의 인간 생활을 얼마나 혁명적으로 바꿔 놓을지 추측케 하는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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