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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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현실 도피 수단” 비판 일축, 지상 최대 축제 만끽
월드컵의 계절이 왔다. 운 좋은 백만명을 빼고, 약 37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이 월드컵을 지켜볼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에 관해서라면, 월드컵을 따라잡을 만한 것이 없다. 성별과 종교, 교육과 임금 수준, 심지어는 체제를 모두 초월해 이토록 열중하는 대상을 사람들이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시청 기록은 이 때문에 월드컵이 열리는 4년마다 깨진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텔레비전 시청자 수는 지금까지의 최고 기록인 32억명이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영국에서 탄생해 프랑스인 줄 리메가 세계화시킨 축구에 왜 이토록 열광할까. 축구가 세계 정치와 경제, 우리의 일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라도 하는 것일까. 천만에. 월드컵의 계절을 맞아 축구 예찬론을 편 프랑스 작가 자크 뤼멜하르트는 다음과 같은 익살을 떤다. ‘서방 선진 8개국(G8)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을 합친, 힘깨나 쓴다는 나라들 가운데 세 나라가 프랑스 월드컵에 얼굴을 못내민다(캐나다·러시아·중국). 다른 두 나라는 참가하기는 해도 큰 욕심을 못낼 형편이다(미국·일본). 게다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 세계 최고의 축제에 주역이 아니다.’(프랑스 외무부가 발행하는 월간지 <라벨 프랑스> 98년 4월호)

축구가 세계 정치·경제와 무관할지는 몰라도, 그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지 10년 후인 54년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라디오 아나운서가 흥분에 들떠 외친 ‘독일, 세계 챔피언!’이 한마디는 나중에 독일 선거전에서 두고두고 쓰이는 명언이 되었다. 옛 소련을 죽도록 증오했던 스페인의 철권 통치자 프랑코 총통이 어쩔 수 없이 공개 석상에 서서 옛 소련 국가를 들어야 했던 것도 64년 축구 시합 때였다.

69년 엘살바도르가 이웃 온두라스와 전쟁을 벌인 것도 축구 시합 때문이었다. 철저히 페쇄적인 체제를 유지했던 옛 불가리아에서는 정부나 정부와 관련된 모든 기관과 단체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수도 소피아의 경찰 축구팀인 CSKA 소피아팀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준우승한 이탈리아팀 응원단들이 썼던 ‘전진! 이탈리아’라는 구호는 전진이탈리아당의 선거에 이용되기도 했다.

인간이 축구에 열광하는 네 가지 이유

사람들이 축구를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우선 이 스포츠 종목이 인간의 본능과 관련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굴러다니는 공을 보게 되면, 축구가 뭔지 모르는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발로 찬다고 한다. 공이 자기 몸집에 비해 너무 크다고 느낄 경우만 손으로 집어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축구는 오프사이드라는 미묘한 규칙만 제외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룰을 가지고 있다. 육상이나 수영과 같은 기본 종목들을 빼고 나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축구는 사람이 타고나는 신체와 지능과는 별 관련 없이, 평등한 게임이다. 축구 역사를 빛낸 선수들 가운데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처럼 장신이 있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처럼 아주 키가 작은 선수도 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브라질의 소크라티스는 깡마른 체격으로,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기장 안에서 모든 선수들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축구는 인생의 축소판이 되었다. 축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이 하는 시합이면서, 팀워크가 승패를 좌우한다. 게다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개인이나 팀의 성공 여부를 외부에서 판정하는 사회처럼, 축구도 레프리의 판정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끼어든다. 그리고 그 판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때 아르헨티나 팀의 마라도나는 심판의 눈을 속이는 핸들링 반칙으로 골을 따냈다. 그러나 심판이 반칙을 선언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에 공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축구에는 희망과 역전의 드라마가 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알제리는 독일을 꺾었으며, 66년 런던 월드컵 때는 북한이 이탈리아를 눌렀다. 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각팀 간에 수준차는 있지만, 정해진 승부란 없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축구는 정치와 경제를 넘어서는 만국 공용어로 자리잡았다. 물론 축구를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축구가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란의 회교 지도자로 철저한 반미주의자였던 호메이니는 축구가 현실 도피 수단이 되고 있다며, 한때 축구를 금하기도 했었다(이란은 천신만고 끝에 이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같은 조에 속한 미국과 겨루어야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서 도피하는 데 축구, 월드컵보다 더 자극적이고도 값싼 방법이 있을까. 게다가 지금 한국은 정치·경제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 상황. 금세기 최후의 축제를 즐기기에는 그야말로 그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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