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불청객 우울증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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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조량 떨어지면 발병 가능성 높아져…여성·기혼자·중졸 이하 학력자 ‘위험’
완연한 가을이다. 이맘때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불청객 중의 하나가 ‘우울감’이다. 가을에 부쩍 우울해지는 것은 여름에 비해 일조량이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햇빛을 2주일 넘게 보지 못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울적해진다. 만물의 에너지원인 햇빛이 사람의 활력과 정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벼운 우울 감정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모나 배우자의 죽음 같은 상황을 맞을 때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것 같은 ‘이유 있는’ 우울감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통제 불능 상태의 우울이다. 우울이 깊어져 병이 된 상태를 일컫는 우울증은, 환자로 하여금 일상 생활과 사회 활동을 할 수 없게까지 한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른다.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셈이다.

지난해 말부터 이른바 ‘IMF 우울증’환자가 늘어가고 있다. IMF 사태 이후 얼마나 우울증이 늘어났는지를 정밀하게 들여다본 연구는 없지만, 지난 4월 가톨릭 중앙의료원 산하 전국 8개 병원이 동시에 실시한 우울증 무료 검사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전국민의 48.5%가 ‘우울’ 경험

가톨릭 의대 김광수 교수는, IMF 사태가 경제적 위기보다 정신적 위기를 더 크게 불렀다고 보고 있다. 전체 참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문가와 상담해야 할 정도로 중증이었다는 것이다. 또 IMF 상황을 탈출할 때 우울증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오히려 사람들이 위기 때는 이를 벗어나느라 정신이 없어 어떤 감정을 느낄 짬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우울에 빠져드는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역사에도 등장하는 우울증을 설명하는 핵심어는 ‘잃어버림(loss)’이다. 사회적 역할, 가까운 사람, 경제 능력, 사회적 혹은 정신적 지지, 건강, 인지 기능, 자율성을 상실할 때 우울해진다. 요즘 한국인들이 IMF 우울증에 쉽게 걸리는 것도 우선 경제 능력과 사회적 역할을 잃은 때문이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 없이 우울을 안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른바 동양 의학에서 말하는 우울 체질이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울해지지만, 우울에 빠지더라도 생활 환경이 초래하는 우울은 대부분 병적인 상태로까지 치닫지 않는다. 쉽게, 자주,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유전적 소인을 물려받은 것이다. 흔히 우울에 빠지는 사람을 보고 주위에서 성격을 바꾸라느니, 마음을 약하게 먹어 그렇다느니 하지만, 이런 유형의 우울증 환자에게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울증이 찾아온다.

실제로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체질·유전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가 놓여 있는 주변 환경 같은 후천 요인을 살피기에 앞서, 체내 생화학 물질의 균형이 파괴되었는지, 신경내분비 계통에 이상이 왔는지, 유전이나 개인의 심리적 특성 같은 선천성 요인을 우선 검진하게 된다. 특히 가족력(歷)이 있는지를 유심히 살핀다. 고려대 의대 안암병원 이민수 교수(신경정신과)는 “보통 사람은 우울증 발병 빈도가 1% 정도인데, 우울증 환자가 있는 가족의 발병률은 5∼15%로 훨씬 높다고 보고된다”라고 말한다.

우울증을 부르는 요인이 환경이든 유전과 같은 내적 요인이든 간에, 우울증은 뇌의 신경 전달 물질 분비에 이상이 일어나 생기는 병이다. 인간의 뇌에는 정서와 감정을 조절하는 세로토닌과 노아에티네플린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우울을 호소하는 환자들은 누구나 정상인보다 이 물질 분비량이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물질이 왜 적게 나오는지, 이 물질이 왜 우울증을 유발하는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우울증은 증상의 정도에 따라 주요 우울 장애와 가벼운 우울 장애로 크게 나뉜다. 우울증 환자 가운데는 전혀 우울 감정을 느끼지 못해 우울증이 아닌 다른 병을 앓고 있다고 우기는 환자도 적지 않다. 이른바 ‘가면 우울증’이다. 또 치매로 오인되기도 한다. 이른바 ‘가성 치매’로서, 집중력 저하나 건망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은 자신이 치매라고 생각하지만 이것 역시 우울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을까. 우울증과 관련한 유일한 체계적 조사 보고서(5천 8백5명)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96년 ‘한국인의 건강 수준에 미치는 영향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은 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왼쪽 맨 위 도표 참조). 지난 1주일 동안 가벼운 우울 증상(CES-D 16점 이상)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백명 가운데 25명이 넘었다. 유병률(일정 기간 한 지역 인구에 대한 환자 비율)이 25.3%나 된 것이다. 우울 정도가 꽤 깊은 상태인 중간 정도의 우울 증상(CES-D 21점 이상)을 호소한 사람은 백명 가운데 14명(14.5%) 이상이었다. 당장 병원에 달려가야 할 중증 우울증(CES-D 25점 이상)도 백명 가운데 9명(8.7%) 가까이 되었다. 이 수치는 미국의 흑인이나 히스패닉계·그리스인보다는 낮지만, 미국 백인이나 일본인·중국인에 비해서는 2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전반적인 수위도 높지만, 15∼22세 청소년(대학생 포함)의 우울증 유병률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왼쪽 도표 ① 참조). 실제로 학업 부진 등을 비관해 자살을 감행하는 청소년의 상당수가 심한 우울증 환자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우대하는 가정과 학교 분위기와, 미숙한 인간 관계 형성 능력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이 청소년을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우울증에 쉽게 노출되는 현상은 다른 나라처럼 한국에서도 뚜렷하다. 모든 연령대에서 여성은 남자에 비해 유병률이 높다(왼쪽 도표 ② 참조).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를 맡았던 서울대 의대 조맹제 교수는 “감정을 발산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어떤 문제를 안으로만 삭이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가정과 사회로부터 강요받는 측면이 있으며, 월경 전 증후군·산후 우울증에서 보듯 호르몬의 변화 탓도 크다”라고 지적한다.
여성 발병률, 남성보다 1.5~2.5배 높아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에 더 많이 걸리는 이유를 남녀간 세로토닌의 분비량 차이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지난해 캐나다 몬트리올 신경학연구소의 미르코 딕식 박사는 미국 과학원 회보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서, 남녀의 뇌에서 각각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은 거의 비슷하지만, 남성의 세로토닌 생산 기능이 여성보다 평균 속도가 52% 빠르다는 것을 밝혀냈다. 따라서 여성들은 순간적으로 세로토닌 분비량이 적어져 우울증에 빠지게 되며, 빈도도 잦아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남성보다 1.5∼2.5배 정도 높다. 아이를 가진 기혼 여성의 우울은 그 여성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최근 ‘기혼 여성의 우울 증상과 심리 사회적 특성’을 3개월간 추적 연구한 오경자 교수(연세대·임상심리)는 “가벼운 수준이더라도 기혼 여성의 우울 증상은 부부 관계나 양육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며, 특히 기혼 여성의 우울증은 가족 관계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우울에 빠지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이혼 또는 별거하거나,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난 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다(72쪽 도표 ③ 참조). 어떤 이유에서든 결혼 상태가 깨질 때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미혼일 때도 꽤 스트레스를 받는다. 조맹제 교수 연구에 의하면 △여성 △결혼 상태 이상 △중졸 이하의 최종 학력이 우울증을 부르는 가장 중요한 위험 인자들이다.

우울증 환자의 ‘종착역’은 자살

우울증은 천의 얼굴을 지녔다. 정신 질환이지만 단지 우울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체 증상을 동반한다. △흥미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늘 피로감을 느끼며 △집중력·주의력·자신감이 현격히 줄어들고 △죄의식과 쓸모없다는 느낌에 시달리며 △착각에 의한 판단 착오를 자주 일으키며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정서·사고·지각 장애 외에도 실제로 몸이 아프다. 우선 잠을 못 자고 먹지를 못한다. 환자의 80%가 불면과 식욕 부진을 호소한다. 드물게 수면과다증과 대식증을 보이기도 한다. 성욕이 아예 일어나지 않아 발기 부전도 일으킨다. 이런 증상 외에도 두통·요통·근육통·흉통·오심·구토·변비·호흡 곤란·과호흡 같은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의 종착역은 자살이다.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망상 속에 들어온 사람들을 죽이려고도 한다. 조맹제 교수의 연구에서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는 응답률이 무려 26.3%에 달했다. 그들 가운데 중증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23.2%나 된다. 서울대 의대 이정균 명예 교수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 중에 자살을 한번쯤 생각했거나 기도한 비율은 각각 16.2%, 3.2%로, 자살 생각은 뉴질랜드에 이어 두 번째 수준이며 자살 기도는 중간 수준이다.

서울대 의대 하규섭 교수는 “우울증 환자들은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직 죽는 것만이 이 모든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몰두한다”라고 말한다. 또 자살 기도가 실패(성공률 15%)하더라도 다시 때를 노린다. 하교수는 우울증 환자에게 죽음은 마약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어서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우울증이 너무 심한 환자는 오히려 자살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살을 행동에 옮길 만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식물 인간 처지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회복되는 단계에서 자살을 시도할 힘을 얻게 되므로 이때가 위험한 시기이다. 우울증은 증상이 없어졌다고 치료하지 않으면 3년 내에 70∼80%가 재발한다. 이 가운데 15%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유전적 소인에서 비롯된 내인성 우울증이 특히 그렇다.

우울증은 명랑하고 낙천적인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심지어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 자기에게 맞는 직업, 먹고 살 만한 재산 같은 행복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사람들도 우울증의 덫에 걸린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미국의 언론인 마이크 윌리스는 “오직 좋지 않은 감정에만 빠져 있었던 암흑의 시기였다”라고 회고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스타이론도 “온몸과 정신이 방향 감각을 잃은 파멸 상태였다.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라고 토로했다.

삶을 저주하며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 우울증. 그러나 전문가들은 효능이 좋은 약이 있으며, 정신·인지 치료, 전기경련 치료 등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낫는 병이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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