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 “재벌 개혁 극비리 진행중”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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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경제로 옮아 가면서 걱정스러운 것은 독과점입니다. 기업 결합으로 인해 독과점 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면 허용할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그동안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런 공정위가 달라지는가. 전윤철 위원장은 각 부처가 쏟아낸 여러 정책 가운데 경쟁을 해치거나 시장 경제 원리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들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최근 그는 은행을 통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의 기업 구조 조정에 대해 ‘신종 관치 금융’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전위원장을 지난 4월30일 과천 집무실에서 만나 재벌 개혁 추진 상황과 이와 관련된 공정위의 역할 등에 대해 들어 보았다. 그는 이미 재벌 내부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8∼9월께 구조 조정 내용이 물위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의 고객은 누구입니까?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니까, 우선 행정 대상은 일반 기업입니다. 기업이 제대로 경쟁하면 그 효과와 이익이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현대 국가의 기능을 규제·감시·국영 기업 운영·분배 네 가지로 봅니다. 프리드먼은 이 가운데 감시와 분배 기능은 강화해야 하지만 규제와 기업 운영 기능은 대폭 줄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정위는 감시 기능을 수행합니다. 시장 경제를 지탱하는 파수꾼이죠.

재벌 개혁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재벌 개혁은 특정 부처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김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2월6일 재벌 총수들과 합의한 5대 과제를 봅시다.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부분은 결합 재무제표 작성과 대외 공시 문제가 핵심인데, 이것은 재정경제부 소관입니다. 상호 채무 보증 해소 문제는 전적으로 공정위가 다루어야 하는 과제이고, 재무 구조 개선은 금감위가 주도해야 할 사안입니다. 또 오너를 포함한 지배 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 문제는 상법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법무부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공정위·재경부·금감위·산업자원부·법무부 등 관련 부처가 힘을 합쳐 풀어 가야 하는 것이죠.

재벌 개혁과 관련해 공정위는 무슨 일을 합니까?

세계화가 본격 진전되기 전에는 약간의 비교 우위만 있어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절대 우위를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 재벌 경영 구조인 선단식 경영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핵심 역량 얘기를 자꾸 꺼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업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만, 공정위는 기업별 경쟁을 유도하면서 그룹 내부에서 주고받는 내부 거래를 철저하게 차단할 겁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돌려 놓고 공급자 위주에서 소비자 위주로 정책을 펴는 것도 공정위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시장 경제로 옮아 가면서 걱정스러운 대목은 독과점이 공고해지고 담합이 싹트기 쉽다는 점입니다. 현재 독과점 품목이 3천여 개인데, 이 가운데 30대 그룹이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독과점 품목이 60%나 됩니다. 공정위는 이런 ‘시장 실패’에 강력히 대응할 겁니다.

전반적인 기업 구조 조정이 왜 이렇게 지지부진합니까?

재벌 개혁이 지리멸렬하다며 답답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지금 재벌 그룹 내부에서는 구조 조정이 엄청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8∼9월께면 (구조 조정의 내용이) 가시화할 것으로 봅니다. 저를 믿어도 좋습니다. 기업들이 그 때까지 비밀로 하려는 것은, 사전에 구조 조정의 내용이 알려지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전위원장께서 삼성그룹 회장이라면 구조 조정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판단 대신 제너럴 일렉트릭(GE) 잭 웰치 회장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웰치는 버림받았다고 할 정도의 회사를 세계 10대 기업 반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81년 이후 1등이 되지 않는 사업을 모두 팔아 치우고 관련 업종에서의 다각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꾀하는 등 대대적인 경영 혁신을 단행한 덕분입니다. 반면 한국의 2세 경영자들은 거느리고 있는 계열사가 몇 개인가를 놓고 경쟁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잭 웰치의 경쟁 우위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 현대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다면 그것을 승인하시겠습니까?

가정을 세우고 입장을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대기업이 부실 기업을 인수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거듭 질문하자) 기업 결합으로 인해 독과점 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효율성 또한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효과가 기대된다면 독과점이 되더라도 허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최근 공정위는 미국의 프록터 앤드 갬블 사가 쌍용제지를 인수한 데 대해 ‘조건부 승인’ 조처를 내렸다).

지주 회사 설립을 돌연 허용하게 된 배경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구조 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지주 회사는 분사화를 통해 한계 사업의 분리 매각 등 구조 조정을 쉽게 하게 한다는 순기능도 있지만, 경제력 집중을 심화하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주 회사 부채 비율 100% 이하, 지주 회사와 자회사간 상호 출자 금지 같은 다섯 조건을 달아 허용하게 된 겁니다.

김대중 정부가 재벌을 몰아치려고만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개혁 방식에는 ‘바람론’과 ‘햇볕론’이 있을 텐데요.

햇볕을 쪼여야 외투를 벗길 수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공정위가 지향하는 것은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렬한 햇볕을 쪼여도 외투를 벗지 않으려 든다면 불가피하게 바람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제도 개선이죠. 가령 적대적 합병·매수(M&A)를 전면 허용해 외투를 벗기는 것입니다.

왜 재벌 개혁이 번번이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총론 찬성, 각론 반대 때문입니다. 늘 겉으로는 개혁해야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저항이 심했습니다. 부처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세계화 같은 경제 질서의 변동이 심하지 않아 절박감도 덜했습니다. 하지만 IMF 사태를 맞아 한국은 구조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또 개혁에는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므로 최고 통치권자의 리더십이 중요한데, 김대통령은 개혁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최근 김우중 차기 전경련 회장이 정부와 금융부터 개혁하라고 주장했는데요.

총체적 부실이 경제 위기를 불렀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정부는 부처 이기주의에 휩쓸려 정책의 일관성을 보이지 못해 불신을 자초했습니다. 금융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고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배타적 국민성도 한몫 했지요. 이 모두가 구조 개혁을 하지 못하게 한 요인입니다. 서로를 원망하며 잘못을 전가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우리를 두텁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앞으로 공정위가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려는 쪽보다는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경쟁 정책으로 활로를 열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미국은 물가·성장· 국제수지를 모두 잡고 있습니다. 거의 완전한 의미의 시장 경제이기 때문이죠. 시장 경제로 옮아 가면서 경쟁 정책이 훨씬 중요해지는데, 이런 흐름을 우리도 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경쟁 정책을 주관하는 공정위도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규제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규제 행정에 안주하며 즐겨온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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