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 장인' 임성천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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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직업학교서 ‘식육 마이스터’ 획득 … “육류 유통, 구조 조정 길 열겠다”
“푸줏간에도 장인(匠人)이 있다.”

“정육점에도 장인이 있다고? 고기만 썰면 될 텐데 무슨 장인인가?”

“임성천씨라고, 그는 독일에서 식육(食肉) 마이스터(meister·匠人)가 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이 마이스터가 지난해 12월16일 경기도 구리시에 ‘휴먼 마이스터’라는 정육점을 열었다. 구리시는 80년까지는 양주군 구리면이었는데, 임꺽정이 난 곳이 바로 양주이다. 임꺽정은 백정 신분에 한이 맺혀 산적이 되었고, 임성천(43)은 식육 마이스터 타이틀을 자랑스레 내걸었다.

임씨는 한국 식육 시장을 근본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금의 유통 시스템에서는 한국 축산업계가 수입 육류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서 나오는 이같은 주장의 저변에는 식육 가공 외길을 걸어온 그의 인생 굴곡이 깔려 있다.

서울 성동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되기를 꿈꾸고, 주저 없이 건국대 축산가공학과에 지원했다. 대학 시절 그는 4H운동에 참여해 사회 모순에 눈을 떴다. 한때 교련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는 등 학생운동에 열중했으나, 군대를 마친 후로 다시 식육 가공 외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당시 건국대 축산대학은 독일의 육가공 회사인 라스팅 사에 매년 2명씩 연수생을 보내고 있었다.

8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친구 2명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어 시험에는 떨어졌으나, 그를 눈여겨 본 최병규 교수가 특별히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럽은 가기 힘든 곳이었다. 덕분에 그는 대학 후배 최순애씨(42)와 결혼할 수 있었다. 장모께서 유학생이라고 여겨 반겼기 때문이다.

라스팅 사에서 그가 한 일은 잔심부름이었다. 요즘 기술 연수생 명목으로 한국에 와 궂은일을 도맡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와 비슷한 처지였다. 선배 연수생 대부분은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몰래 독일 대학에 입학하고, 그 중 일부는 학위를 받아 모교 강단으로 돌아왔다. 라스팅 사 사장은 한국 연수생이 자꾸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임씨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사장을 찾아가 “나는 독일 대학에 가지 않겠다. 식육 분야의 전문인이 될 테니 직업 학교에 보내 달라”고 한 것이다. 독일은 한국과 학제(學制)가 다르다. 의무 교육을 마친 후 성적이 좋은 학생은 김나지움(인문고)을 거쳐 대학에 진학한다. 중간 수준 학생들은 실업 학교인 레알 슐레에 입학하고, 공부를 못하거나 가업을 이을 사람은 베르프 슐레(직업 학교)에 들어간다.
고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 6년 만에 ‘장인’ 자격 얻어

3년제 식육 직업 학교를 나오면 도제 자격을 얻는다. 이후 마이스터를 찾아가 3년간 도제 생활을 마쳐야 마이스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시험에 통과해 마이스터 자격을 얻어야 비로소 정육점을 열 수가 있다. 독일에서 소시지를 만드는 것은 이 마이스터들이다. 때문에 정육점마다 맛이 다르고, 수천 수만 종의 육가공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과정인 직업 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내는 바보 같은 결심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사장은 그 생각을 기특하게 받아들였다. 높은 실업률 때문에 독일은 외국인이 직업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장의 도움으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프랑크푸르트 식육 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교육은 철저하게 실기 위주였다. 4일은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하루만 학교에서 이론을 배웠다. 84년 식육 학교를 마친 그는 한국에 돌아와 백설햄을 만드는 제일제당에 입사했다. 제일제당에 근무하던 87년 그는 다시 독일로 가, 마이스터 준비 과정을 밟았다. 라스팅 사 사장이 도와주어 제일제당 근무 기간을 도제 기간으로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2개월 학습 기간을 거쳐 서른여덟 과목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는 근육 조직을 다치지 않고 돼지 한 마리의 살을 뼈에서 깨끗이 발라내 햄과 소시지로 만드는 과정도 있었다. 응시자 98명 중 그는 13등으로 마이스터 자격을 따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제일제당에 입사한 그는 89년 말 꿈을 펼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서울 송파동에 독일식 정육점 ‘마이스터 델리’를 열었다. 그러나 전혀 시장성이 없어 1년 만에 폐점하고 건국햄에 입사했다.

이 당시 한국의 육가공업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어묵을 만드는 어육(魚肉) 가공으로 시작한 육가공 산업은, 80년대 제일제당과 롯데가 참여하면서 축육(畜肉) 가공 시장으로 변모했다. 소비자들이 소시지를 달걀보다도 고급 반찬으로 여겨준 덕분에, 육가공 업체들은 연 30%씩 증설해야 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이때 소시지 시장을 지배한 것은 ‘가격’이었다. 가파른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싼 값을 유지하려다 보니, 기업들은 소시지에 원가가 싼 토끼나 칠면조 고기를 넣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소시지에서 육즙(肉汁)이 나오는 것을 당연시하나, 한국 소비자들은 ‘상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때문에 한국의 일부 제조업체들은 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육즙이 흐르는 것을 막았다. 또 파쇄한 고기가 잘 결합하지 않자, 소금 사용량을 늘렸다. 소금은 고기를 결합시키는 데는 유용하지만, 이런 이유로 한국 육가공품은 품질이 자꾸 떨어져 갔다.

90년대 해외 여행자가 늘어나면서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 유치원에서 소시지 반찬을 싸주지 말라는 통신문을 보낼 정도가 되자, 육가공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다. 시설을 잔뜩 늘린 업계로서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93년 생산자 단체인 축협이 드디어 ‘정도(正道) 생산’을 시작했다. 무방부제·무전분·저염을 특징으로 하는 ‘목우촌’ 상표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임씨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한국의 축산업이 쇠퇴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유통업자가 따로 있다 보니, 소비자들의 불만이 유통업자에게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산자는 전혀 변신하지 못했고, 여기에 육류 시장 개방이라는 큰 물결이 닥쳐오자 한국 축산업계는 공멸 위기를 맞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임씨는 이러한 허약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독일처럼 식육 생산업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것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먼 마이스터’를 개장한 것은 이러한 구조 조정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식육뿐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가 IMF 한파에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덩지만 컸지 허약 체질이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민초들이다. 이런 식으로 모순이 극대화하자 임꺽정이 탄생한 것 아니겠는가. 정육점이든 이발사든 장인-도제 과정을 거쳐 근본부터 철저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이제 임꺽정은 산으로 가지 않고 소비자들 속을 파고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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