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길로 되돌아간 이재정 전 국회의원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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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입문해 모든 걸 잃었다”/외국인 노동자 돕기에 전력 투구
이재정 신부(61·샬롬의집 사목)는 소년의 미소를 가졌다. 언제나 먼저 웃는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의 얼굴은 웃음기를 잃은 적이 없다. 그의 개구쟁이 같은 눈웃음은 사람들을 무장 해제한다. ‘눈으로 하는 말 빼면 시체’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다.

다시 신부로 돌아간 그에게서 대학 총장·국회의원을 지낸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격식과 권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 총장 시절에는 10년이 넘은 프레스토 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녔다. 지금도 의원 시절 타던 그랜저XG를 손수 몰고 있다. 워낙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다가, 이내 차 살 능력도, 기사를 둘 능력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장난기 많은 소년의 이미지를 가졌지만 어린 시절에 개구쟁이는 아니었다. 충북 진천에서 우체국장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지극히 소심했고 내성적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냇가에서 멱을 감을 때 그는 한 번도 뛰어들지 못했다. 한켠에서 늘 옷을 지키는 아이였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이념 서클에 가까운 ‘향진회’를 만들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청년으로 변신했다.

부모가 성공회 신자여서 그는 어려서부터 성공회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사제의 길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대학 시절 은사인 김진만 교수가 “배고프고 힘들지만 성직자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라고 권했다. 그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꼭 그 길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학 졸업 후 성공회대의 전신 미카엘신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그는 키가 작다. 160cm를 겨우 넘는다. 하지만 세상을 끌어안는 크고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 1972년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민·사회 운동에 나섰다.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YH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문제가 생긴 방직공장 대책위원회마다 그는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 이런 공장이 서른 군데가 넘었다. 미행과 가택 연금 그리고 연행이 이어졌다. 고문까지 받았다. 어둡던 세월이었다. 이 시기 함석헌·문익환·문동환·한승헌·조영래·김상근 등 평생을 함께 할 스승과 동지를 만났다.
1980년대 들어 캐나다에 유학해 신학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 힘쓰던 그는 1988년 귀국하자마자 성공회신학교를 맡으라는 명을 받았다. 신학교를 이끌 수 없다며 3주를 버티다가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교수와 학생을 통틀어 100명 남짓인 학교는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암담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기 시작했다. 모든 열정을 쏟았다. 집을 팔아 학교에 헌납했고, 봉급은 물론 강연료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한편으로는 진보적 학문을 기치로 내걸고 신영복·조희연·손규태 등 학문적 신념이 뚜렷한 학자를 영입했다. 역사에 희생된 사람을 원상 회복시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성공회신학교는 1992년 성공회신학대로 성장했고, 1994년에는 성공회대학교로 승격했다. 서울 시내에 20년 만에 생긴 종합 대학이었다. 학생 수는 3천명으로 늘어 있었다. 성공회대는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자식과도 같았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현실 정치에서도 실현하고 싶었다. 1973년 윤보선씨 집을 드나들며 민주회복국민회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DJ가 대통령 재임 중 어려움에 빠지자 팔을 걷어붙였다. 어려운 길이지만 나를 필요로 한다면 한번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1999년 그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총무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정치를 해서 모든 걸 다 잃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었다. 전국구 배지까지 버리며 열린우리당 창당을 도왔다. 하지만 대선 직전 한화건설에서 받은 채권 10억원을 당에 전달한 혐의로 지난 1월 구속되었다. 감옥에서 50일을 보내야 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모세 5경과 <태백산맥>을 읽으며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에서 기득권을 나누어 갖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출정 나간 그를 위해 빵과 우유를 남겨놓는 동료를 보며 작은 사랑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도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감옥살이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부패’ 세력이라는 낙인은 견뎌내기 어려웠다. 한 언론사는 그를 ‘탕자’에 비유했다. 정치에 뛰어들어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이 날아갔다는 허무함이 밀려들었지만 지금은 개의치 않는다. 자기 혼자만 나락에 떨어졌다는 생각도 떨쳤다. 이신부는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어떤 결과를 미리 따져 본 적이 없다. 가치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애초에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2002년 대선에서 유세위원장을 맡았다. 노무현 후보 외에 정해진 연사가 아니면 단상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주요 임무였다. 대선 마지막 날 유세에서 정동영 의원이 올라가자 추미애 등 여러 정치인이 올라갔다. 그들은 막아도 올라가고 불러내려도 또다시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이게 정치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정작 유세위원장인 그는 단상에 못 올라갔다. 그게 그렇게 어렵더란다. 이재정 신부는 정치인이었지만 ‘대중 정치인’은 못되었던 것이다.

정치를 떠나고 보니 아쉬움도 적지 않다. 그는 역사 의식이나 정신적인 개혁이 결여된 채 너무 현안에만 치중하고 있는 정치권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행정 수도 이전 문제도 정신적인 기반 없이는 공허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국회의원 이재정은 사제의 길로 복귀했다. 이신부는 교회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 지난 5년간 정치권에 선교사로 파견된 셈치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이신부는 요즘 경기도 남양주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샬롬의 집’을 맡고 있다. 1994년 직접 세우고 4년간 사역했던 곳이다. 이신부는 이곳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인의 벽을 허무는 일에 전념할 작정이다.

이신부는 일요일마다 필리핀·방글라데시·나이지리아 등 외국인 근로자와 한국인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한다. 이신부는 “외국인 노동자 일로 군청에 가고, 병원에 쫓아가 병원비를 깎아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내가 국회의원을 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라며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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