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며 즐기는 답사 여행의 묘미
  • 吳允鉉 기자 ()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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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월출산 일대 문화 유산 답사기/옛 절ㆍ탑ㆍ비석의 '숨은 멋' 새롭게 발견
유홍준 교수가 1993년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펴내면서 한국의 답사 문화는 질적으로 엄청나게 변화했다. 일단 문화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지식도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폐해도 없지 않았다. 답사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거기에 여행사가 가세하면서 수많은 문화 유산이 손때를 탔다. 함량 미달인 답사 업체들은 주마간산식 프로그램으로 답사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전국 문화 유적지에 여행객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요즘 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1박2일 일정에 동행해 보았다.

서울 답사객 10여 명을 태운 대형 버스가 스모그의 그물을 빠져나온 것은 저녁 6시께. 40여 분 뒤 경부고속도로 신갈 부근에서 빨간 조끼를 걸친 할머니 다섯 분이 합류하자 버스 안이 아연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 뒷자리에 앉아 생각해 보니, 수건과 칫솔 따위를 챙겨 여행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느 작가는 새로운 이야기와 만나려고 여행을 한다는데, 저들은 왜 답사 여행을 떠나는 걸까. 차의 흔들림을 따라 마네킹처럼 끄덕거리는 일행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낯이 설었다.

인솔자인 국학연구소 김경원 연구원이 이번 답사의 의미를 간단히 정리했다. “전남 영암군 월출산 일대 유적지를 보면서,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 이해하고 오는 것이다.” 김씨에 따르면, 답사를 자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현직 교사이다. 문화에 가장 목말라 해야 할 젊은이들은 거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답사는 걷기만 할 뿐 뛰지 않는 ‘유희’.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을 리가 없다.

김씨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가져온 ‘폐단’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홍준 교수가 큰일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미술사 관점에서 유적을 소개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절이 가진 본래의 가치, 신앙의 의미 등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 바람에 미술사적인 부분을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뭔가 섭섭해 한다는 것이다.

답사 일정표를 보았다. 숙소 도착은 21:00시. 내일 일정은 도갑사(08:00)→왕인 박사 유적(09:30)→월남사지(10:40)→녹차밭→무위사(11:00)→점심(12:30)→나주 반남고분(14:00)→서울로 출발(15:30).
“보잘것없는 유물부터 보아야 전부 보인다”

천안 근처를 지날 때쯤 이태호 교수(전남대)의 월출산 답사기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된다. 미리 비디오 테이프를 준비한 모양이다. 월출산과 그 산자락에 얹힌 도갑사·무위사의 구석구석까지 소개하는 프로였다. 이교수는 방송에서 “작은 것·보잘것없는 유적부터 보아야 전부 보인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 프로그램 내용 모두 내일 일정에 큰 도움이 될 듯싶다.

숙소인 월출산 밑 ‘월출산장’(0693-472-0405)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예상보다 2시간이나 더 지났다. 그만큼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오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간단히 세수한 뒤 밖으로 나오니 인공 등불 아래 벚꽃이 환하다. 눈 시리도록 ‘꽃등’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력 11∼12일쯤인가, 달빛이 제법 풍성하다. 음력을 느끼게 해주는 사하촌(寺下村)이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다.

다음날 아침 재재거리는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창밖을 내다보니, 밤에는 몰랐는데 월출산 자락이 뒷마당까지 내려와 있다. 산장 앞마당에 만개한 벚꽃·동백꽃·수선화와 누릇누릇해진 목련이 지천이다.

아침 식사 뒤 도갑사 일주문 앞으로 나섰더니 개구쟁이처럼 생긴 강사가 기다리고 있다. 영산 원불교대학 김영수 교수(한국사·84쪽 상자 기사 참조). 도갑사 해탈문 앞에서 그의 말문이 터진다. 해탈문의 의미, 절이 산으로 들어온 연유, 도선 국사와 관련된 갖가지 설화, 젊은 스님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콸콸 흘러나온다.
거대한 수미왕사비(守眉王師碑)와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 앞에서는 거의 청산유수다. 고비(古碑)를 등에 진 거북이가 머리를 돌린 사연, 거북이의 꼬리가 제각각인 이유, 고비의 변천사….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험상궂게만 보이던 고비가 예사롭지 않다. 미술적 관점을 거의 배제한 김교수의 해설은 담백하고, 날카롭고, 깊이가 있다.

뒤쪽을 보니 김교수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일행이 있다. 신갈에서 승차한 목영화씨(71).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정년 퇴직하고 15년쯤 답사와 산행을 다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수원에서 함께 온 김기순(77)·양경자(77)·윤석희(73)·김태옥(67) 씨는 그의 동행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수년째 같이 답사를 다니고 있단다. 들뜬 표정으로 설명을 듣는 할머니들의 표정이 소녀처럼 해맑다. 그만큼 그들의 노년이 아름다워 보인다.

소멸했던 기억을 부활시키는 ‘답사의 힘’

다음 코스는 4세기께 일본에 학문을 전파한 왕인 박사 유적지(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이곳이 왕인 박사의 생가가 있던 곳이냐 아니냐를 놓고 아직 논란이 분분하다는 김교수의 설명 때문일까. 유적지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다. 급조한 듯한 사당과, 일생을 극화해 놓은 전시관을 둘러보니 못 그린 벽화를 보는 것처럼 심란하다. 왠지 우리 일행이 토끼에게 속은 거북이 같았다.

60대 윤중섭씨도 심란한가 보다.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이번 답사에 동행한 것은 오로지 나주시 반남 고분 때문이다. 평소 한·일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그 유적이 일본 고분과 비슷한지 비교해 보고 싶다”라고 자신의 답사 목적을 밝힌다. 그 순간 ‘아하, 답사 도사들은 오로지 한 목적 때문에 차에 몸을 싣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위사 가는 길에 녹차밭과 월남사지(月南寺址·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들렀다. 월남사지 석비(보물 313호) 옆에서 동백꽃이 의자왕의 궁녀처럼 뚝뚝 낙하한다. 문득 강원도 두메, 고향 생각이 난다. 뒷산 골짜기에 저렇게 새빨간 산딸기가 열리곤 했었지…. 답사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소멸했던 기억마저 부활시키는 힘.

월남사지 3층 석탑(보물 298호)은 몸돌이 높아 늘씬한 느낌을 주었다. 김영수 교수는 그 앞에 서서 “이 탑은 고려 시대 탑이지만, 백제 시대 정림사지 5층탑을 빼닮았다”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백제·고려 탑 사진을 한 장 한 장 비교·분석하며 각 시대 탑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탑을 보면서 잠시 야무진 화강석을 떡 주무르듯 한 석공의 심정이 되어 보라고 권했다. 벚꽃 잎이 분분히 나는 하늘이 푸르다. 마치 연보랏빛 필터를 낀 카메라 렌즈처럼 주위가 아름다워 보인다.

유홍준 교수는 무위사(無爲寺·강진군 성전면 월하리)를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 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이라고 했다. 그런 무위사이건만 몇 년 전에 들렀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하던 입구에는 자연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호젓하던 마당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극락전(국보 29호)은 여전히 아름답다. 특히 간결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좌우측 벽은 몬드리안의 추상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비례의 상쾌함’을 이룬 기둥들은 보기 좋았다. 눈이 편하다. 마음이 잘 마른 광목처럼 쫙 펴지는 기분이다.
여행기를 요령 있게 쓰는 법

답사팀이 또 하나 눈여겨본 것은 마당의 배례석(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돌)이다. 배례석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는데, 담담하면서도 고결해 보였다. 김교수는, 연꽃 장식과 수법으로 볼 때 이 배례석이 백제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장담한다.

설명을 들으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30대 여교사 최영수씨(안양 부흥중·과학)는 “답사할 때마다 늘 마지막 목격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온다”라고 했다. 올 때마다 유적이 훼손되고 변질되어 있어서이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부터는 사람의 손때를 거의 안 타고, 발굴이 안된 곳만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김교수의 힘있는 목소리가 계속 무위사 허공을 맴돈다. 한쪽 눈동자가 없는 관음보살상이 담긴 탱화에 얽힌 전설. 파랑새가 사람으로 변해 몰래 벽화를 그렸단다. 그런데 주지 스님이 엿보는 바람에 그만 마지막 ‘화룡점정’을 못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관음보살상의 눈은 ‘텅’ 비어 있다. 김교수는 희한하게도 이같은 전설이 부안 내소사와 불갑사에도 전해온다고 덧붙였다. ‘전설이나 신화가 있는 절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무위사를 돌아 나오는데 불쑥 그같은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영암읍내 오복식당(0693-473-2077)에서 들었다. 직접 담갔다는 갈치통젓·전어창젓을 밥에 얹어 몇 숟갈 뜨자 입맛이 확 돌았다. 누군가 외쳤다. “반찬이 서른 가지나 되네!” 남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진미의 향연. 모두들 신나고 즐거운 얼굴이다.

마지막 목적지인 반남 고분군으로 가면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를 뒤적였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여행을 했을까. 내용이 밋밋하다. 좋은 구절은 단 하나, 이것뿐이다. ‘여행지에서 뭔가 흥미로운 일이 있으면 짧아도 좋으니 곧 메모해 둘 것. 이것이 여행기를 쓸 때 요령이다. 인간의 기억력만큼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것은 없으니까.’

반남 고분군에서 알게 된 뜻밖의 역사

반남 고분군(나주시 반남면)의 고분 몇 개는 특이한 모습이다. 원형이 아니고 윗 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형태이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평평한 고분 위에서 사위를 내려다본다. 비옥한 땅. 2천여 년 전 풍경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김교수는 이곳이 한국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한다. 왜(倭)가 본래 한국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학설’까지 꺼내놓는다. 분묘 형태가 일본의 고분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고분 때문에 답사왔다던 윤중섭씨는 고분 안을 볼 수 없어서 아쉬운 표정이다. 김교수는 이미 다 도굴되어, 고분 안에도 볼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윤씨 얼굴에서는 좀처럼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스모그 안으로 다시 엉금엉금 기어드는 길. 어떤 사학자는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로운’ 비원 안의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것을 자신의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다고 한다. 오늘 우리 일행 가운데 그같이 아름다운 ‘소유욕’을 느낀 사람이 있을까.

하긴 그런 심미안을 갖지 못해도 상관없다. 답사객 임재근씨(51)의 감회처럼 준비 없이 떠난 여행에서 ‘인간을 만들어온 이 땅을 다시 생각하고, 이 땅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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