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인가 세포덩어리인가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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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연구 허용' 이후 인간 배아 복제 둘러싼 논쟁 가열


백혈병을 앓는 한 어린이가 있다. 담당 의사는 골수 이식만 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는 물론 친척, 골수 기증 희망자까지 조직 검사를 했지만 아이의 골수와 일치하는 이가 없다. 이식이 가능한 골수를 기다리는 동안 병은 아이의 생명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생명공학자들은 인간 배아 복제 간(幹) 세포(줄기 세포)를 이용하면 골수 제공자를 찾지 않아도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들어낸 배아 세포로부터 간 세포를 추출하여 혈액 세포로 분화시킨 다음 환자에게 이식하면 면역 거부 없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생명공학자들의 구상이다(그림2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에서는 인간 배아를 조작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피할 수 없다. 배아란 정자와 난자가 수정해서 만들어진 수정란으로서, 하나의 생명체가 갖추어야 할 기관들이 형성되기 전 단계를 말한다. 이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면 태아 과정을 거쳐 인간이 태어난다.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인간 배아 연구를 반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차 인간으로 탄생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배아를 인간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살인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체세포 기술(그림1 참조)로 배아 세포를 복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복제 인간을 탄생시키는 출구를 열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이론적으로는 복제한 배아가 자궁에 착상할 경우 복제 인간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1월22일 영국은 연구 목적의 인간 배아 세포 복제를 허용함으로써 과학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백혈병을 비롯한 난치병을 정복하는 것이 배아를 조작하는 위험성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효용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배아 세포 복제 연구 허용을 놓고 종교계·시민단체와 과학자들의 논쟁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배아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종교계와 시민단체는 배아 연구를 반대하지만 과학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과학자들은 최소한 척추 선이 나타나고 간이나 폐 등 내부 장기를 형성하기 직전인 14일 이전의 배아는 생명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14일 이전의 배아를 연구해서 난치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정선 교수(서울대·생화학)는 '복제한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는 것'만 엄격하게 금지하면 복제 인간 탄생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다고 말한다.


생명공학자들 "의학적 난제 해결 지름길"

윤리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과학자들이 배아 연구를 고집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초기 단계 배아 세포에서는 의학적으로 유용한 인간 배아 간 세포를 분리해 낼 수 있다. 배아 간 세포는 간이나 폐 등 2백10개 이상의 장기로 자라날 능력을 갖고 있는 '원시 세포'이다. 이 배아 간 세포가 인체 특정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도록 배양 조건을 맞추어 주면 환자에게 필요한 세포로 자라게 된다. 마리아병원 생명공학연구소 박세필 소장은 "인간 배아 간 세포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의학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우선 배아 간 세포 배양을 이용한 초기 태아 발생 과정을 연구해 각종 불임 원인을 규명할 수 있고, 배아 간 세포가 특정 세포로 분화하는 체계를 연구함으로써 세포 이상으로 발생하는 질병과 퇴행성 질환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 나아가 배아 간 세포를 특정 세포로 배양하여 개발한 신약의 안전성과 효능을 테스트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다.

질병 가운데 바이러스 질환을 제외한 대부분은 세포성 질환이다. 파킨슨씨병·알츠하이머병 같은 퇴행성 질환과 척추손상·중풍·심근경색·소아 당뇨병·백혈병 등은 그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가 손상되거나 기능이 모자라서 발생한다. 이러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세포를 이식해 주는 '세포 대체 요법'이 최선이다. 그 세포 대체 요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인간 배아를 이용한 간 세포 연구가 필수이다. 간 세포에서 자라난 신경 세포는 척수를 상하게 하는 낭포가 생기지 않도록 치료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 세포와 파킨슨씨병을 치료할 도파민을 생성해 내는 신경 세포의 인위적인 분화가 가능하다.


"냉동 수정란 이용하자" 대안도 나와

이 효용성 때문에 인간 배아 연구를 반대하던 이들 중의 일부는 복제 배아 세포가 아닌 냉동 수정란을 이용한 연구는 허용할 수 있다고 한 발짝 양보한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행하는 병원에는 시술에 이용하고 남은 냉동 수정란이 많다. 인공 수정은 반드시 한번에 성공하지는 않기 때문에 수정란을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 인공 수정이 성공할 때까지 쓰고 남은 수정란들은 5년 동안 보관되었다가 폐기된다. 참여연대 시민과학기술센터 김환석 교수는 "어차피 버려질 수정란이라면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일정한 감시 아래 배아 간 세포 연구에 이용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제 배아 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금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에둘러 가는 방법이 있는데, 생명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복제한 배아 세포를 이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이 동물이나 냉동 수정란이 아닌 복제 배아 세포를 선호하는 까닭은 치료 단계에서의 면역 거부 반응이 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 세포에서 추출한 것이어야 면역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복제한 배아 세포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환자의 유전자와 99% 이상 동일하다.

골수 제공자가 많아도 백혈병 환자의 골수와 일치하지 않으면 이식할 수 없는 경우처럼, 세포 역시 면역 조건이 맞는 다른 사람의 세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환자 몸에서 간 세포를 추출해 이식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어 배아 세포를 복제하지 않고도 면역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지만, 배아 세포를 복제해 쓰는 간 세포 치료를 병행해야 난치병 정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강조한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동물이나 수정란으로 간 세포를 연구해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1980년대 초 쥐의 배아 세포로부터 간 세포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이후, 1998년 11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존 기어하트와 위스콘신 대학 제임스 톰슨이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 간 세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11월 존스 홉킨스 대학 제프리 로스타인 박사는 쥐의 배아에서 얻은 간 세포를 모아 마비된 쥐에 주입하여 쥐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척추에 주입된 간 세포가 성숙한 신경 세포로 분화하기 시작하면서 손상된 세포 기능을 개선한 것이다.

이밖에도 과학자들은 쥐 실험을 통해 조혈 세포·심근 세포·인슐린 분비 췌장 세포 및 신경 세포로 분화하는 것을 입증했다. 또 한국 마리아병원 기초의학연구소 박세필 소장팀이 지난해 인간의 냉동 수정란에서 추출한 간 세포에서 심근 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을 비롯하여, 세계 과학자들은 인간 배아 간 세포로부터 근 세포·혈관 세포 등을 분화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물론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만으로 배아 간 세포를 이용한 세포 질환 치료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직 간 세포가 특정 세포로 분화하도록 조절하는 인자를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 올 연말 법안 확정

그러나 이용성 교수(한양대 의대·생화학)는 현재와 같은 발전 속도라면 수년 내에 인간 배아 간 세포를 임상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교수는 "초기에는 면역 반응이 적은 뇌 조직을 대상으로 퇴행성 뇌질환 등에 대한 간 세포 이식 치료가 시도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환자 자신에게서 추출한 간 세포를 이용하거나, 체세포 복제 배아 연구가 진행되어야 면역 거부 반응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배아 간 세포 복제는 생명체를 새로 창조하는 개체 복제와 다르므로 복제 인간에 대한 우려 때문에 효용성이 높은 의학 연구를 차단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영국에서 인간 냉동 수정란을 이용한 간 세포 연구만이 아니라, 인간 배아 세포 복제 연구까지 확대해서 허용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체세포 복제 기술을 갖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간 세포 연구의 지름길인 배아 세포 복제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배아 세포 복제 연구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현재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부가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 6월, 과학기술부는 5월까지 초안을 완성하고, 부처간 협의를 통해 연말까지는 법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영국과 미국의 선례를 따라서 한국에서도 배아 세포 복제 연구가 허용될지는 이 법안의 통과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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