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문명'이 새로운 병을 낳는다
  •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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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침략·아프리카 개발 등이 변종 질병 부채질

사진설명 인간이 만들어낸 전염병? : 광우병은 소 사육에 인간이 과도하게 개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은 영국에서 광우병 소를 부검하는 장면


질병에는 역사가 있다. 여러 가지 질병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데에는 자연사(自然史)적인 요인도 작용하지만, 문명 또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질병들은 대개 문명과 문명이 접촉하는 과정과 문명의 확대 과정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것으로 15세기 말부터 몇백 년에 걸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 원정대의 서인도 제도 '발견'에서 시작된 유럽인들의 침략과 약탈은 찬란했던 아메리카 원주 문명을 완전히 파괴했다. 유럽인들의 총과 대포도 한 문명의 멸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은 유럽인들이 몸에 지니고 있었던 여러 병원체였다. 홍역 바이러스·인플루엔자 바이러스·두창 바이러스와 같이 당시에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미생물들이 찬란하고 거대한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인들이 고의로 세균전을 펼친 것은 아니다. 병원체의 존재와 질병 감염 경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으니까.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와 같은 '구대륙'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홍역·인플루엔자·두창 따위 병이 없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그러한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유럽 문명에 버금가는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전투 능력도 유럽인 약탈자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던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와 사회가 그리도 쉽사리 궤멸한 데에는 바이러스의 침략에 대한 방어 무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마도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홍역·두창 전파

현대 사회를 암울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소인 에이즈도 인간의 문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원래 원숭이에게만 있던 HIV(에이즈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진 데에는 아프리카 원시림을 대규모로 벌채하고 개간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학자들은 HIV 따위 리트로 바이러스들과 그 조상들이 수천 년, 어쩌면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의 영장류 몸안에서 살며 진화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것들이 언제 사람에게 넘어왔는지 정확한 시점을 집어낼 수는 없다. 분명한 기점이 있는 병이란 별로 없다. 대개는 다른 생물종에 기생하던 미생물이 산발적으로 사람에게 병을 일으켰다가 다시 잠잠해지고는 한다.

그러다가 환경이 크게 변화하거나, 인간의 행동 양식이 바뀌거나, 미생물들에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사람들에게 널리 유행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아프리카 여러 곳에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 오랫동안 원시림에 머물러 있던 미지의 병원체들이 사람에게 옮겨졌으며, 그것이 발달된 운송 수단과 대규모 시설 등을 통해 급속히 전세계로 퍼졌다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HIV이며, 그것이 일으키는 병이 에이즈라는 것이다. 에볼라 열병·라사 열병·마르부르크 병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문명'이 새로운 병을 부르는 것이다.

아프리카 원시림 개발이 가져온 이득이 작지 않겠지만, 그에 대해 인류는 여러 가지 무시무시한 질병 창궐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최대 피해자가 개발 이득의 최대 수혜자가 아니라 아프리카와 그밖의 제3 세계의 힘없는 민중이라는 점이다. 이득과 손실의 대차대조표와 더불어 그 수혜자와 피해자가 각각 누구인지를 함께 살펴야 개발과 문명화의 의미가 뚜렷해질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해 말 인간 광우병, 즉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이 전세계로 확산될 우려가 있으며, 에이즈 이상으로 21세기의 가장 위험한 전염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역시 마찬가지 지적을 하며 각국 정부가 광우병이 인간에게 번지는 것을 막도록 예방 조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전세계를 통틀어 지금까지 100명이 채 안되는 환자가 생겼을 뿐이지만 인간 광우병(狂牛病)에 대한 공포는, 특히 유럽에서는 가히 광(狂)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이다. 아직 완전한 정설은 아니지만, 많은 학자들은 프라이온(상자 기사 참조)이 광우병의 병원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원래 채식 동물인 소를 동물 사료로 사육하는 과정에서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라이온이 생겨났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광우병 프라이온을 지닌 소의 골[腦]이나 등골[脊髓] 따위를 먹었을 때 사람에게도 광우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15세기 말의 아메리카 '발견'이 없었더라면 아메리카 원주 문명과 원주민이 멸망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0, 1970년대 아프리카 개발 붐이 없었다면 에이즈가 창궐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터이다. 마찬가지로 소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지 않았더라면 소와 인간에게 광우병이 절대 생기지 않았으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침략, 아프리카 원시림 약탈, 소 사육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개입이 각기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질병의 역사는 그와 더불어 그러한 발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유전자 변형(조작)과 생명 복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이 '위대하지만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발전'만이 진보인 양 여겨온 대다수 인류에게 점점 더 큰 목소리로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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