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 한국 테니스 '새 역사' 스메싱
  • 기영노 (스포츠 해설가) ()
  • 승인 200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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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16강 등 신기록 행진 계속…
"서비스 보완하면 세계 10위도 가능"


사진설명 '한국의 희망' 이형택 : 최근 앤드리 애거시에게 한 세트를 따내는 등 선전을 계속하고 있다.ⓒAP연합

한국 스포츠에는 종목마다 선구자 구실을 한 사람과 굵직한 업적을 남긴 선수들이 있다. 축구의 김용식 차범근, 마라톤의 손기정 황영조, 프로 복싱의 김기수 유명우 등이다. 그러나 남자 테니스에서는 선구자 노릇을 한 사람과 굵직한 업적을 남긴 선수를 한 사람으로 통일해야 한다. 이형택(25·삼성증권)이다.

이형택은 현재 남자 프로 테니스 협회(ATP) 랭킹 82위에 머물러 있지만 올해 안으로 50위 권까지 올려놓으려 하고 있다. ATP 랭킹 50위면 연간 수입 20억원 이상이 보장되어 부와 명예가 따르는 상위 랭킹이다.

지난 2월28일 오후 1시50분께(한국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에 있는 아더애시 테니스 코트를 걸어나오는 이형택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지난 1월 중순 벌어진 호주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세계 랭킹 4위 앤드리 애거시(31·미국)에게 1 대 2로 패한 것이 아쉬웠지만, 나름으로 선전해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형택은 이번 ATP투어 2001 사이베이스 오픈(총상금 37만5천 달러) 1회전에서 앤드리 애거시를 만났다. 세트 스코어 1 대 1, 마지막 3세트 게임스코어 2 대 2에서 애거시의 서비스게임을 따내며 3 대 2로 앞서 파란을 일으키는가 했으나, 결국 3 대 6으로 패했다.


올해 목표, ATP 랭킹 50위 진입


이로써 이형택은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ATP 랭킹 10위권 이내의 선수에게 한 세트를 따내는 신기록을 추가했다.

이형택은 지난해 9월 벌어진 세계 테니스 4대 그랜드슬램 대회(미국·영국·호주·프랑스 오픈) 가운데 하나인 미국 오픈에서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본선(128강)에 올랐다. 본선 1회전에서 제프 타랑고 선수(미국)를 3 대 1로 제압해 한국 선수로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출전 사상 첫승을 올렸고, 2회전에서는 세계 랭킹 13위인 프랑코 스쿼랄리 선수(아르헨티나)를 3 대 0으로 가볍게 이겨 그랜드슬램 대회 시드를 배정받은 선수를 처음으로 제압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사진설명 '전설'과의 악수 : 지난해 9월 이형택은 미국 오픈에서 피트 샘프라스(오른쪽)와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였다.ⓒAP연합

이형택은 3회전에서 세계 랭킹 67위 라이너 슈틀러 선수(독일)를 3 대 1로 누르고 그랜드슬램 대회 사상 처음 16강에 올랐으나, 테니스계의 살아있는 전설 피트 샘프라스(미국)를 만나 0 대 3으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이형택은 '그랜드슬램 대회 13차례 우승'이라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록을 갖고 있는 샘프라스와 첫 세트에서 타이브레이크(6 대 7 패)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여 미국 테니스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형택은 미국 오픈이 열리기 직전 출전한 브롱크스 챌린저 대회(미국 브롱크스)에서 애덤 피터슨(미국)·레기날스 웰렘스(벨기에) 선수 등을 꺾고 5연승을 올리며 우승을 차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오픈 이후에 벌어진 삼성증권 챌린저 대회(서울)에서도 제임스 세쿠로보(호주)·라덱 스테파넥(체코)을 차례로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해 건재를 과시했다.

<테니스 코리아> 김홍주 편집장은 이형택을 "포핸드 스트로크는 세계 정상권이다. 백핸드 스트로크도 나무랄 데 없다. 서비스의 정확도와 서비스 리턴만 보강하면 세계 랭킹 10위 이내 선수와 언제 싸워도 이길 실력을 갖고 있는 한국 테니스 사상 최고 선수이다"라고 평했다.

이형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이종성씨(당시 42세)를 잃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 최춘자씨(59)는 삼형제를 키우려고 강원도에서 상경해 식당 7∼8 군데를 옮겨다니며 가장 노릇을 해왔다. 이형택은 홀어머니의 고생을 가장 안타까워한다. 이형택의 첫 번째 꿈은 어머니가 큰 식당 주인이 되어 카운터에서 돈만 받게 해드리는 것이다.


홀어머니 '식당 주인' 되게 하는 것이 첫번째 꿈


이형택은 강원도 횡성에 있는 우촌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라켓을 잡았다. 어머니 최춘자씨는 '학자 집안에서 웬 운동선수냐'며 펄쩍 뛰었지만 이형택은 막무가내로 테니스를 고집했다. 이형택의 쇠고집을 꺾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당시로는 귀했던 그라파이트 라켓을 사주며 아들의 성공을 빌었다.

제가 좋아서 시작한 테니스 선수 생활이지만 이형택에게도 방황한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때 테니스가 너무 힘들어 팀을 무단 이탈해 가출까지 했었다. 당시 어머니는 아들 걱정에 만사를 제쳐놓고 숙소에서 며칠 밤을 지샜다. 이형택의 가출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배가 고파서 제발로 찾아 들어온 것이다. 어머니 최씨가 핼쓱해서 돌아온 이형택에게 "정 힘들면 테니스를 그만두라"고 권하자 이형택은 "배가 너무 고팠다. 다시는 나가지 않고 테니스만 열심히 하겠다"라고 약속한 뒤 테니스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이형택은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다섯 은인을 잊지 못한다. 이종훈 선생은 4학년 때부터 담임을 맡으며 이형택의 아버지 노릇을 자처했다. 이선생은 '도끼'라는 별명답게 혹독하게 훈련했다. 이형택은 5학년이 되자 대회에 나갈 실력을 갖추었고, 전국소년체전에 강원도 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땄다.

김종관 코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테니스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이다. 이형택은 지금도 대회가 끝나면 김코치에게 조언을 구하곤 한다. 전 국가대표 전영대 감독은 건국대와 국가 대표 시절을 포함해 모두 6년 동안 이형택을 가르쳤다. 이형택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전감독은 "형택이는 세계 10위권 선수도 이길 수 있지만 300위권 선수에게도 쉽게 진다"라고 지적하며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한다.

그밖에 한의사이기도 한 김두환 강원도 테니스협회장은 이형택의 고질인 어깨 부상을 치료해 주며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주원홍 삼성 감독은 이형택의 자질을 알아보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삼성 촉탁 사원으로 발령해 경제적인 부담 없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형택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성균관대 김성배 감독은 "이형택이 미국 오픈에서 16강에 오르고, 앤드리 애거시 선수에게 한 세트를 빼앗은 것은 한국 테니스 현실로 볼 때 기적 같은 얘기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가 자신감을 갖고 더욱 노력한다면 올해 안에 투어급 대회 우승은 물론 ATP 랭킹 50위권 진입도 가능하다"라고 전망한다.

이형택의 가방에는 늘 아령과 줄넘기가 들어 있다. 투어 중에도 체력 단련을 생활화하고 있을 정도로 테니스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형택은 새너제이에서 곧바로 애리조나 주 스코츠테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열리는 프랭클린 탬플던 클래식에 출전해 다시 한번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대결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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