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복통' 한국 프로야구 20년사
  • 기영노 (스포츠 해설가) ()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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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팬서비스 볼 입으로 받은 아줌마,

대주자가 자살 질주하기도


1982년에 시작된 한국 프로 야구가 어느덧 20년째를 맞는다. 프로 야구는 어린이들에게는 꿈을, 젊은이들에게는 건전한 여가를 제공하겠다며 출발했다. 당초 목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암울했던 5공 시절에 프로 야구는 우리 삶의 청량제였고, IMF 때도 변함없이 볼거리를 제공했다. 프로 야구는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그라운드 밖에서 일어난 일들은 잘 알려져 왔으나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프로 야구가 성인식을 치르는 올 봄, 그라운드 안에서 벌어진 '요절 복통 프로 야구 20년사'를 돌아보았다.


헬멧에 공 맞고 대머리 들통 난 김용국




전 LG 트윈스 수석 코치였던 김용국씨(40) 가 삼성 라이온스에서 3루수로 활약하던 1980년 대 말이었다. 텔레비전으로 프로 야구 삼성 경기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석에 김용국이 들어서자,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이 원바운드로 홈 플레이트를 맞고 튀어 올라 헬멧에 맞는 바람에 헬멧이 벗겨졌는데, 저런! 대머리였던 것이다. 김용국은 땅으로 떨어지는 헬멧을 재빨리 받아서 다시 썼지만 이미 '버스 지나간 뒤'였다. 삼성 라이온스 선수 가운데서도 가장 점잖은 편에 속했던 김용국 선수가 대머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사실 김선수가 대머리라는 것은 팀 동료들도 잘 몰랐다.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동안 목욕도 혼자 하고 잠잘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용국 선수는 선천적인 대머리가 아니었다. 어릴 때 머리에 화상을 입어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 다리에 쥐나 포복으로 '백 홈'


1987년 7월9일, 인천구장. 만년 꼴찌 청보 핀토스(현대 유니콘스의 전신)를 맞이한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이 3연전 가운데 2승1패만 하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절호의 찬스였다.


3 대 3 동점에서 연장 10회 초, 투아웃에 1,2루 찬스를 맞은 고 김동엽 감독은 발이 느린 1루 주자 김용달 대신 준족인 김우근을 대주자로 내보냈다. 다음 타자 신언호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 청보 양상문 투수의 2구를 받아쳐 중견수 키를 넘는 장타를 날렸다. 투아웃 이후였기 때문에 아무리 발이 느린 1루 주자라도 홈까지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청보 중견수 김윤환이 재빨리 뒤로 달려가 부지런히 송구했다.


이 때 인천구장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3루를 돌아 홈으로 치닫던 김우근이 갑자기 다리를 꼬며 쓰러진 것이다. 3루 코치는 쓰러진 김우근에게 빨리 일어나서 달리라고 목이 터져라 재촉했다. 김우근은 다시 일어나 달리려 했으나 홈까지 남은 7∼8m가 마라톤 풀 코스만큼 멀어 보였다. 다리에 힘을 모아 발을 내디뎠으나 몇 발자국 뛰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관중석에서는 웃고 떠들고 난리가 났다.


김우근은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김윤환이 던진 공은 착실히 중계되어 청보 포수 김동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김동기는 얼굴에 잔뜩 웃음을 머금은 채 얼굴이 일그러진 채 기어들어 오는 김우근의 머리에 태그를 했다. 김우근은 전날 감기에 걸려 약을 먹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대주자로 나갔다가 전력 질주하는 바람에 다리에 쥐가 난 것이었다. 이 경기를 비기는 바람에 김동엽 감독은 또 잘렸다.


발이 너무 빨라 기절한 사나이




1982년 10월6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롯데의 라이벌전. 1점 차로 앞선 해태의 7회말 공격에서 해태의 전형적인 단거리 타자 김종윤이 자신 있게 후려친 공은 쭉-쭉 뻗어 중앙 펜스 쪽으로 날아갔다. 롯데 중견수 김재상은 100m를 10초대에 끊는 빠른 발을 이용해 공을 잡으려 했지만 공은 이미 키를 넘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빨랐던 데 있었다. 김재상은 빠른 스피드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펜스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김재상이 기절하건 말건 김종윤은 2루와 3루를 돌아 유유히 홈에 들어왔다. 프로 야구 최초의 그라운드 홈런이었다. 또한 이 홈런은 김종윤이 그 해 69경기에 출전해서 때린 유일한 홈런이기도 했다.


포수 김영진의 위대한 착각


1997년 8월23일, 대구구장. 전국에서 가장 무덥다는 대구의 삼복 더위에서 삼성 라이온스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더블 헤더를 치르고 있었다. 더블 헤더 1차전, 9회초 삼성의 마무리 전문 투수 김태한이 리드하고 있던 2사 1, 2루 상황에서 마지막 타자 장재중을 삼진으로 잡았다. 삼성 포수 김영진은 '승리 공'을 팬에게 서비스하려고 생각하고 관중석으로 던져버렸다. 주심도 심판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그 순간 삼성의 백인천 감독과 쌍방울의 김성근 감독이 동시에 그라운드로 뛰어 나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이었던 것이다.


김태한이 투 스트라이크 원 볼에서 던진 4구째 공이 원바운드로 들어왔는데 그 공을 타자가 헛스윙했으면 분명히 스트라이크다. 설사 포수가 잡았더라도 그 공이 쓰리 스트라이크일 경우 포수가 타자를 태그하거나 타자주자보다 먼저 1루에 송구해야 쓰리 아웃이 된다. 김태한 투수·김영진 포수·장재중 타자·구심 등 모두 룰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는데, '야구 귀재'인 두 팀 감독이 재빨리 알아채고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왔으나 공은 이미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경기는 5분 후 다시 속개되었다. 그러나 김태한의 어깨는 이미 식어버렸다. 쌍방울이 무려 5점이나 뽑아내 세이브를 챙기려던 김태한은 졸지에 패전 투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야구 수준이 높은 삼성의 대구팬들은 실컷 웃은 다음 한숨을 내쉬어야 했고.


관중석으로 강속구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경기 시작 전 홈 팬들에게 사인볼을 던져 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1992년 어느날, LG 트윈스의 김건우 선수가 던진 공에 한 아주머니가 얼굴을 맞아 이가 3개나 부러졌다. 김건우가 뒤에 앉아 있는 관중에게 주려고 멀리 던지려다 보니 '강속구'를 뿌리게 된 것이다. 아주머니는 앞의 젊은이가 그 공을 받을 줄 알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강속구를 입으로 받은 것이다. LG는 예외적으로 치료와 보상을 해주었다.


"내 앞길은 코치도 못 막아"


1993년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삼성 라이온스와 LG 트윈스의 플레이오프 2차전. 1점을 리드당하던 LG의 9회말 마지막 공격. 노아웃에 1루 찬스를 맞이한 LG 이광환 감독은 재미 동포 출신 윤 찬을 대주자로 내세웠다. 발이 빠른 그에게 2루타성 타구에 동점을 기대하면서.


다음 타자가 이감독의 기대대로 우익수 쪽으로 높은 안타성 타구를 쳤다. 공이 우익수 쪽으로 높이 떠오르자 안타라고 판단한 윤 찬은 1루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 찬이 2루를 돌 무렵 삼성의 우익수가 그 공을 잡았다. 이제 윤 찬은 1루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윤 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LG와 삼성 더그아웃은 물론 관중석에서도 폭소가 터져나왔다. LG의 3루 코치 최정우가 윤 찬의 질주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윤 찬은 '왜 나를 막느냐'며 최정우 코치의 제지를 뿌리치고 만세를 부르며 홈에 뛰어들었다. 결국 LG는 그 경기에서 패하고 말았다.


'사오정' 된 박선일


1996년 인천구장에서 있었던 삼성 라이온스와 태평양 돌핀스 전. 두 팀은 초반부터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급기야 삼성 투수가 태평양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그러자 분위기를 눈치 챈 삼성 백인천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모아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태평양이 보복을 했다. 태평양 정명원 투수가 초구로 삼성의 이승엽을 맞힌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본 삼성의 박선일이 갑자기 '죽여'라고 소리치더니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가 정명원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관중석에도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박선일을 따라 나가지 않은 것이다. 무안해진 박선일은 뒤통수를 긁으며 더그아웃으로 되돌아왔다. 백감독이 '참아야 한다'고 지시할 때 박선일은 화장실에 가 있었다.


연습용 방망이로 생애 첫 연타석 홈런




LG와 태평양에서 활약하던 윤덕규는 3할에 목숨을 건 사나이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3할을 쳐야 한다는 주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시즌 어느날, 방망이가 하도 맞지 않으니까 백인천 감독이 '넌 안 맞으니까 이 방망이로 쳐봐라'며 농담처럼 1500g짜리 킹(KING) 방망이(선수들은 보통 920g짜리 방망이를 쓴다)를 손에 쥐어 주었다. 선수들이 허리에 대고 몸을 푸는 연습용 방망이였다.


그런데 윤덕규가 그 방망이를 들고 나가 초구에 홈런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사연을 안 LG 더그아웃에서는 웃고 난리가 났다(방망이는 크기에는 제한이 있으나 무게에는 제한이 없다). 윤덕규가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눈을 감고 휘둘렀는데 홈런이 된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한번 재미를 본 윤덕규가 두 번째 타석에서도 그 방망이를 들고 나가 또 홈런을 쳤다는 사실이다. 윤덕규의 생애 첫 연타석 홈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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