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신] 잠드시라 넋이여, 함께 가자 생명이여(5월3일)
  • 이문재 (moon@e-sisa.co.kr)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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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과 함께 맞은 첫날 밤


뉘엇 해가 저물자, 소쩍새 소리가 더욱 가깝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정초등학교 자리. 오후 2시부터 4시
40분까지 6.8km를 걸어온 도보 순례단이 막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


문정리 이장이 스피커로 주민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주민
여러분. 잠시 후 8시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 상영이 있아오니, 저녁을
일찍 드시고 많이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


8시께. 어둑신한 운동장으로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엄천강 하류 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지리산 천왕봉 북동쪽, 가파른
계곡의 저녁은 일찍 어두워진다. 상현달이 구름 사이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지리산 북쪽에서 시작해 지리산을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에도는 8백50리
도보순례의 첫 날은 영화 <태백산맥>과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은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리산에서 평생을 살아왔을 문정리 사람들은 50여 년 전,
산골 아이의 눈으로 지켜보았을 그 '무서운 날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5월3일 오후, 칠선계곡과 천왕봉이 건너다 보이는 의탄분교
자리에서 시작된 지리산 8백50리 도보순례의 첫날 밤은 그렇게 '태백산맥'을
넘고 있었다.




8백50리 도보순례 첫 걸음을 내딛다


오후 1시. 의탄분교 자리에는 도보 순례단과 시민·환경단체,
지역 종교인, 그리고 지역 주민들 등 2백여 명이 모여, 도보순례 출정식과
지리산 댐 백지화 및 엄천강 살리기 결의대회를 가졌다.(관련기사 참조)



지리산 도보순례는, 범시민·환경 단체와 범종교계가 대거
참여해 구성된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공동대표 : 김상원 김장하
김정헌 김지하 도법 서경석 성유보 수경 이병철 이선종 이세중 이종훈
인명진 정중규 지은희 최창조)이, 범종교계 100일기도, 백두대간 종주,
지리산 공부모임 등과 함께 펼치고 있는 '지리산 위령제'(2월16일~5월26일)의
하나다.


오후 2시 정각. 드디어 도보 순례단이 출발했다.


순례단 단장인 수경스님과 순례 대장 이원규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 사무처장, 백두대간 종주단 대장 박기성씨를 선두로, 도보
순례단 대원 22명과 이병철 국민행동 공동대표(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
녹색연합 공동대표), 이선종 공동대표(원불교 종로교당 교무)를 비롯한
구간 참가자(하루나 이틀, 일정한 구간만 참여할 수도 있다) 10여 명이
대열을 이루었다.


의탄분교를 나서자 마자 왼쪽으로 꺾어, 함양 쪽으로 길을 잡았다.
하늘은 쾌청하고, 지리산은 신록으로 눈부셨지만, 휴천면으로 내려가는
1084번 지방도로 오른쪽 아래로는 눈길을 주기가 저어스러웠다.



지리산 북쪽을 휘감아 나가는 엄천강은 더 이상 1급수가 아니었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던 시린 강물이 아니었다. 영산강 수계인
상류 지역(전북 남원시 운봉읍, 인월, 아영, 산내)이 오염돼 녹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주민들은 '난생 처음 보는 녹조 현상'이라고 말한다.


취재팀은 행렬 후미에 섰다. 2차선 지방도. 오가는 차량도 많지 않았지만,
걷는 사람, 즉 행인은 전혀 없었다. 이제 국도는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오직 엔진에 의해 굴러가는 자동차를 위한 것이다.


쿠션이 좋은 조깅화를 신었지만, 걸음걸이에서 리듬이 생기지 않는다.
두 발바닥과 흙(생명) 사이에 아스팔트가 있다. 순례단 리더들은 아스팔트가
도보 순례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다. 관절에 큰 무리가 간다는 것이다.


시속 4km 정도. 오후 2시20분의 햇빛은 목덜미에 떨어진다. 짧은
그림자가 앞선다. 아, 얼마만에 그림자를 보며 걸어보는가. 아직 길은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이 도보 순례기는 앞으로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등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민감해질 것이다).


휴천면으로 들어선다. 휴천. 강물이 쉬어간다는 곳. 휴천면 문정리
용유담에서 엄천강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왼쪽으로 휘돌아 나간다. 용유담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를 건넌다.


녹조가 끼여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 엄천강을 건너자마자 잠시 휴식.
이원규 대장(3년 전, 서울 생활을 작파하고 지리산에 들어온 시인이다)이
'강사'로 나선다. 지리산에 댐을 세운다는 논의가 오갈 때, 이곳 용유담이
가장 먼저 떠오른 후보지였다. 지명이 그렇듯이, 마을 사람들은 일제
때부터 댐을 놓을 자리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자, 당국에서는 댐 예정지를 이곳에서 3km 정로
하류로 내려가는 문정리로 정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리산 댐 건설 반대 운동은 낙동강 살리기 운동으로 이어졌고, 낙동강
살리기 운동은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지리산 살리기는 결코 지리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지리산 댐 건설 계획은 주춤해 있다. 수자원 공사 측은 백지화하겠다고
말했지만, 건설교통부에서는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용유담에서 산길을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소로를 걷는다. 가파른
경사지에 오래된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 뒷산 능선이 지리산 국립공원의
북쪽 경계선. 강 건너편 역시 급경사지. 역광을 받는 연한 신록들이
눈부시다. 산소 알갱이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일 것만 같다.


휴천면 송전리 세동 마을. 정자나무 아래, 마을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학 때 고향집을 찾은 자식을 맞이하듯 반가워한다. 댐이 건설되면
이주해야 할 지리산 토박이들. 70가구 가운데 40가구가 이미 이농했지만,
이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아들딸에게 얹혀 사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도시에 나가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 한복 차림에 작은 배낭을 매고 행렬 뒤쪽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이병철 국민행동 공동대표에게 지리산 공부 모임에 관해 물었다.


이 대표는 "그동안 담론이 없었다. 민족 문제든, 세계사적 문제든
기왕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모색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개별적이었다"라며
지리산 공부 모임이 "대립과 경쟁, 죽임의 논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논의의 마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리산 공부 모임은 지리산 위령제가 제기한 문제 의식을 담론화하는
한편, 젊은이들과 학계의 논의를 촉발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대표는 말했다.


이대표에 따르면, 지리산에 대한 사유는 모든 문제에 대한 고뇌이다.
지리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후 4시 35분. 행렬은 다시 엄천강을 건너 문정초등학교 자리로
들어섰다.


순례단 지원팀이 먼저 도착해, 대형 텐트 두 동을 쳐놓았고, 교단
바로 옆에서 저녁 밥을 짓고 있었다.



박기성 대장의 구령에 맞춰 몸을 푼 다음, 대원들은 스탠드에 모였다.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고, 조를 편성했다.


19명 일반 대원은 다양했다. 전주, 경기도 광주, 서울, 안양, 충남
홍성, 여수 등 지역뿐 아니라 직업도 각기 달랐다. 시인, 화가도 있었고,
귀농학교 출신, 통신회사 직원, 여대생,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 등등(도보
순례 참가자들은 앞으로 자연스럽게 소개될 것이다).



 
















5월3일 지리산 도보순례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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