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천재의 '갈채 없는 백홈'
  • 기영노 (스포츠 평론가) ()
  • 승인 2001.05.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퇴출 위기 몰린 이종범 '영욕의 그라운드'


이종범(31·주니치 드래건스)은 1998년 6월23일을 죽어도 잊지 못한다.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 투수가 던진 볼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아 뼈가 부러진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이종범은 일본 프로 야구 데뷔 첫해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와지리 투수에게 일격을 당한 뒤 야구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천재로서의 감각도 떨어지고 타격 자세도 변했다.




영광과 좌절 : 이종범은 일본 진출 첫 해인 1998년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려 웃었으나(오른쪽), 그 뒤로는 내내 내리막길을 걸으며 웃음을 잃었다(왼쪽).


그 해 10월8일, 이종범은 도쿄 진구 구장에서 벌어진 야쿠르트 스왈로스 전에서 2타수 1안타(도루 1개)를 기록한 뒤 '다쳤던 팔꿈치 근육이 당겨 무리하기 싫다'며 코칭 스태프에게 나머지 원정 다섯 경기에서 빼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종범은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해인 1998년 67경기에 출전해서 타율 2할8푼3리 홈런 10개 17도루를 기록했다. 시즌 절반만 뛰고도 도루에서 단독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주루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일본의 매스컴들도 '파이팅이 좋은 선수' 또는 '야구를 알고 하는 선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1999년은 이종범에게 시련의 해였다.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몸쪽 공 공략에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또한 상대 팀으로부터 철저히 분석 당해 특유의 '번개 타법' '뛰는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얻은 외야수 자리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운명 바꾸어버린 팔꿈치 부상


더욱 큰 문제는 주니치 드래건스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 결정적으로 멀어졌다는 점이다. 호시노 감독은 외야수로 시즌 통산 타율 2할3푼8리에 그친 이종범이 마무리 훈련에 참가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종범은 아버지(이계준씨) 병환을 핑계로 마무리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물론 구단으로부터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호시노 감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호시노 감독은 이종범이 마무리 훈련에 참가하지 않자 그때부터 다른 용병을 물색해 호주의 데이비드 닐슨(당시 31세·일본명 딩고)를 데려왔다. 딩고는 메이저 리그에서도 3할대 타율을 올렸으나, 주니치 드래건스가 2000년 호주에서 벌어지는 시드니올림픽에 호주 대표로 출전시켜 준다고 약속하자 기꺼이 일본행을 택했다.


이종범은 딩고와의 경쟁에서 밀려 2000년 시즌을 2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딩고는 일본 프로 야구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 딩고를 밀어내고 외야수로 활약한 이종범은 2할7푼5리로 타격 랭킹 20위권에 진입하며 2000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외야수 치고는 장타력이 떨어지고 도루도 19개를 시도해 11개만 성공하고 8개를 실패할 정도로 양적 질적인 면에서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호시노 감독은 2001년 시즌을 아예 '이종범 추방의 해'로 정한 듯했다.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경험이 있는 아지 티몬스 선수를 데려와 이종범과 경쟁시켰다. 호시노 감동은 티몬스가 일본 프로 야구에 적응하지 못해 한때 타율 1할대에 머물렀으나 꾸준히 1군에 남도록 배려했다. 그러면서도 이종범은 1,2군을 오르내리며 13타수 2안타(1할5푼4리)에 그치자 두 번이나 2군으로 쫓아보내 사실상 퇴출했다.


일단 해태 복귀…주니치측 이적료 요구 가능성


이종범은 한국에서 야구 천재 소리를 들었다. 프로 데뷔 2년째인 1994년에 기록한 3할9푼3리(496타수 196안타)는 프로 통산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이다. 같은 해에 세운 도루 84개, 1997년에 달성한 30-30 클럽 가입(홈런 30개, 도루 64개), 그리고 1993년과 1997년에 팀을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받은 두 차례의 한국 시리즈 최우수선수상, 5년 동안 통산 타율 3할2푼4리 등은 한국 야구 사상 최고 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이종범은 1997년 10월25일 한국 시리즈 최우수선수 시상식장에서 "선동렬 선배가 활약하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뛰고 싶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종범은 그로부터 1개월 반 만에 해태 구단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해 12월3일 마의웅 사장이 이종범의 일본 진출 허용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2월10일 해태 타이거스와 일본의 주니치 드래건스는 이적료 4억5천만 엔(약 50억원), 계약금 5천만 엔(약 6억원) 연봉 8천만 엔(약 8억8천만원)에 이종범을 트레이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2월28일 서울 타워호텔 중국식당에서 벌어진 '이종범 환송연'에는 이종범 후원회장인 민주당 정대철 의원(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을 비롯해 이해찬 의원 등 후원회원 2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종범 후원회'는 이종범이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3년여 동안 1,2군을 오르내리며 머리에 원형 탈모증이 생기고, 입안이 허는 등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스포츠의 특성상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현재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되어 있다. 따라서 언제든지 KBO 총재에게 복귀 신청을 하는 것으로 선수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해태가 1997년 주니치와 계약할 때 '한국에 복귀할 경우 주니치는 해태에 선수 보유권을 무조건 반환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일단 해태로 복귀하게 된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해태가 고액 연봉(6억원 정도)을 지급해야 할 이종범을 껴안고 갈지, 아니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할지는 별도의 문제다. 다만 주니치는 1997년에 해태에 지급한 고액 이적료(4억5천만 엔) 때문에 약간의 이적료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