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도보순례 : 제5신] '토지'의 무대, 악양가는 길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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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1일, 금요일. 9일째, 맑은 날이다. 섬진강을 베고 잠들었던 순례단은 다시 섬진교를 건너, 섬진강을 왼편에 두고 거슬러 오른다.

강 건너는 백운산 자락. 이른 봄이면 폭설처럼 내리는 매화꽃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어제 하동사람들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개장터 앞에서 구례 간전을 잇는 다리가 공사 중인데, 계획 단계에서 다리 이름을 '화합대교'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경남 하동에서 전남 구례를 잇는 다리이므로, 영호남이 화합하자는 뜻을 담으려는 의도였다.

화합대교라는 소리를 듣고 지역 주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아니, 화합이라니. 우리가 언제 싸웠단 말인가!" 하동, 함양, 사천 등 서부 경남 지역은 구례나 남원 등 호남 지역과 갈등이 거의 없다. 오래 전부터 같은 문화권이었던 것이다.

강을 건너고, 도계를 오가며 살을 부비며 살아온 이들에게 화합대교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화합대교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관리들의 탁상공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호남 주민들이 항의하자, 화합대교는 '남도대교'로 개명했다.

한 주민은 "정작 화합대교는 광주나 대구 사이, 또는 아직도 엄연한 좌·우 이념 대립의 사이에 놓여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리, 즉 가교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교는 여기와 저기, 나와 너 사이를 이어준다. 도보 순례단의 깃발에 새겨져 있는 '생명 평화, 민족 화해'가 바로 가교의 논리, 다시말해 상생의 논리다.

다른 길이 있으면, 순례자들은 아스팔트를 벗어난다. 섬진강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제방으로 올라선다. 하동에서 악양 사이에는 배밭이 넓다. 배밭 주위에는 울타리처럼 물앵두나무가 줄지어 있다. 쳐다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뇌세포가 아닌 몸의 기억력!

악양은 박경리의 <토지> 이전부터 유명했다. 악양은 '악양동천(岳陽洞天)'이었던 것이다. 동천은 신선 혹은 신선이 되기 직전의 도인들이 사는 곳. 풍수적으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지형이다. 일찍이 최치원은 지리산에서 '도인 3천명이 살았다는 이상향'을 찾기 위해 애썼거니와, 쌍계사 계곡을 오르다 '세이암'에서 그 흔적과 마주칠 수 있다. 세이암에서 더 올라가면 의신 마을이 나오는데, 그 의신 역시 '의신동천'으로 불린다.

 
악양면은 왼쪽으로는 성제봉, 오른쪽으로는 깃대봉과 칠성봉, 앞으로는 악양벌과 섬진강, 뒤로는 시루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멀리 평사리 최참판댁을 바라보며 악양 면 소재지로 들어간다. <토지>. 1996년 8월15일 새벽, 박경리 선생이 그 대하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생각난다. 그때, 원주에 머물며, 그 마지막 순간을 취재했었다. 박선생은 이곳 평사리 앞을 자동차를 타고 지나쳤을 뿐, 마을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했다.

악양 면사무소 앞 팔경루에 자리를 잡고, 매암 차문화 박물관을 찾았다. 3대 째 이어져 내려오는 야생 차밭이다. 박물관장 강동오씨가 우리 차의 특성과 차따는 법을 일러준다. 순례단 대원들이 한 시간 동안 딴 차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강관장은 "차를 직접 따 보아야 찻값이 너무 싸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곡우를 전후해 따는 우전 같은 경우, 20년 숙련된 사람이 하루 종일 따는 양이 고작 800g이다.

저녁에 군민 연대의 밤이 열렸다. 하동민주청년회 회원 이호곤씨와 하동사랑운동연합 이충렬 사무국장이 나와 핵 폐기물 처리장 설치반대 운동에 대한 경과 보고와, 설치를 반대하는 이유 등을 설명했다. 정작 '군민'들은 많이 참가하지 않았다.

침낭 속에 들어가 머릿속으로 <토지>를 넘겼다. 동학의 피가 흐르는 구천이(환)가 별당아씨와 함께 숨어든 지리산의 밤은 어떠했을까. 내일 아침, 최참판댁 앞을 지나 화개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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