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신] 이 광적인 '직선 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5월6일~7일)
  • 이문재 (moon@e-sisa.co.kr)
  • 승인 2001.05.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호강을 따라 남하한다. 5월6일, 일요일. 도보순례 나흘째.


그러고 보니, 단 하루도 공사 현장을 마주치지 않은 날이 없다. 곳곳에
새로 길이 뚫리고 있다. 새로 나는 길은 두 가지 원칙에 복종하고 있다.
직선화, 그리고 평지화. 구불구불하고 좁은 옛길은 폐기된다. 고갯길도
버려진다. 여지가 없다. 고갯길 아래로 터널이 개통된다.


아마 한 세대 뒤에는 '옛길 살리기 시민행동'이 결성되어, 사라진
옛길을 찾아 도보 순례하는 운동이 펼쳐질지 모른다.


두 점 사이를 최단 거리로 연결하려는 욕망. 이 직선 숭배는 광적으로
보인다. 직선 숭배는 인간만의 풍요와 편의를 목표로 하는 속도 제일주의의
'아들'이다. 오직 인간만이 직선을 고집한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직선 숭배의 폭력을 바로 보는 일. 그것이 도보 순례의 한 목표이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그리하여 폐곡선에서 개곡선으로!


허리통증은 박기성 대원(백두대간 종주대장)의 응급처치로 조금 가라앉았다.
산악조난구조대원인 박씨의 조언에 따라, 발을 뒤로 치켜 올리는 동작을
자주 한다. 척추, 내 몸의 백두대간이 아픈 것이다. 백두대간의 맨 끝인
여기, 지리산이 그러하듯이.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경호강변 숲길로 접어들었다. 안개가 걷히자
행렬 바로 앞에 웅석봉(해발 1099m)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다. 허욱 국장은 말한다. "흔히들 지리산하면,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만을 연상하는데, 응석봉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능선이 주능선만큼 길다". 지리산의 품은 의외로 큰 것이다.



경호강은 진주 남강에 가까워질수록 오염이 심하다. 물은 짙은 녹색이고
거품이 자주 보인다. 장마철 큰물이 버려놓고 갔을 쓰레기들이 도처에
있다. 냉장고, 운동화, 그리고 수많은 페트병들. 인간은 유일하게 '쓰레기를
생산하는 동물'이다.


오후 순례는 경호강 제방으로 올라선다. 제방 길을 걷다가,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동안 비포장 도로는 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위주의 시각. 걷기, 즉 '두 발 인간'의
입장이 없어진 것이다.


길과 자동차(속도/직선)에서 길과 사람(느림/곡선)으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대립에서 상생으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이라면
그 패러다임은 반드시 길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빨치산 추모제와 '빨치산 토벌 기념관'


사흘 동안, 몸이 길에, 걷기에 적응한 것일까. 허리 통증을 괄호에
넣는다면, 견딜만 하다. 몸의 친화력은 놀랍다. 걸음걸이가, 몸이, 조금씩
길에 붙는다. 길과 몸이 만나 출렁거리는 리듬감.


목화 시배지 바로 옆에 천막을 친 다음, 저녁 식사. 서봉석 산청군의원이 순례단을 찾아왔다. 내일 시천면 외공마을에서 열리는 위령제
때문이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함양·산청,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견주어 최근에야 알려졌다. 1960년, 4·19 직후 두
일간지에 보도된 이후 38년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위령제 기사
참조).


수경 스님, 서의원, 허욱 총괄진행, 이원규 대장 등이 둘러 앉아
지리산 일대 개발 문제를 놓고 가벼운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관광버스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스님과 서의원이 급히 일어섰다.


서울 통일광장, 범민련,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 11개 단체 회원과
학생들이 빨치산 출신 노인들과 함께 지리산 삼성궁에서 추모제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삼성궁에서 빨치산 100여
명이 몰살당했는데, 지난해 시신 7구를 발굴해 옛동지들을 중심으로
추모제를 지냈다. 오늘이 그 두 번째였다.



부산 범민련 의장 서상권씨와, 하동지역 전투부대원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순자 씨 부부 등이 버스에서 내려 수경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5월26일, 달궁에서 열리는 지리산 위령제 참가 문제 때문이었다. 남부군·비전향
장기수 출신들 사이에서, 달궁에서 열리는 지리산 위령제 참가 문제를
놓고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위령제 이전에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해야 한다는 원칙론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남부군·비전향
장기수 출신들은 일흔이 훨씬 넘었지만 열혈 청년들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정신이다"라며, 그들이 달궁 위령제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지리산 삼성궁에서 남부군 추모제가 열리는 날, 지리산 중산리에서는
'빨치산 토벌 기념관' 개관식이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1년이 가까워 오지만, 지리산에서 이념의 골은 아직도
깊고 넓어 보였다.


부산 지역에서 온 빨치산 출신과 젊은 통일운동가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좌회전하자마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개관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보였다. 버스는 그 아래로 달려 갔다.


 










5월6~7일 지리산도보순례 일정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