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체제가 무너지면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흡수 통일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체제가 붕괴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래서 남한이 흡수해야 한다면 비용이 좀 들더라도 흡수하는 것이 북한 동포에게도 좋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고위 관료와 전문 경영인을 거친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은 우리 사회의 보수 엘리트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당직을 맡고 나서는 '새로운 DJ 저격수'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공격적인 정치인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최근 현안을 포함해서 한나라당 주류의 현실 인식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김의장을 만났다.
DJ에 대해 정육점 주인이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고 비난한 데 이어 DJ 가신들은 목포 앞바다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 심한 발언 아닌가?
대중 연설을 하다 보면 과한 발언을 할 때도 있다. 어려운 정책 얘기만 하면 사람들이 지루해 하기 때문에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농담 삼아 한 얘기다. 공식 회의에서 한 얘기도 아닌데 여당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DJ 정권 초기에 구속된 것 때문에 개인 감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데.
야당 정책위 의장은 당의 입장을 앞장서 주장하고 여당의 정치 공세에 적극 맞서다 보면 발언 수위가 높아지는 경우도 있다. 전국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서 튀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내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인기를 얻어서 대통령 출마를 하겠나 뭘 하겠나? 대구시장 하려고 그런다는 얘기도 있지만, 대구시장쯤은 이렇게 안해도 될 수 있다.
DJ가 낡은 사회주의식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낡은 색깔론' 아닌가?
근거 없는 색깔론이 아니다. DJ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화·다원화이다. 그러나 DJ 정권은 개혁을 내세워 정부가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그 관리와 운영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 하고 있다. 의약 분업, 사립학교법과 정기간행물법 개정이 모두 정부 주도형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 아닌가.
여당은 선진국에서도 다 하는 의약 분업이 무슨 사회주의냐고 반박했는데.
의약 분업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정부가 보험료를 모두 걷고 보험 수가도 정부가 결정하고, 막무가내로 의약 분업을 실시하라고 강요하고 하는 것이 모두 정부 통제형 사회주의식 정책이라는 얘기다. 민간 의료 보험을 도입하고 의약 분업도 점진적으로 해 가야지 획일적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정기간행물법을 만들어 언론사 소유 지분을 30%로 제한하자는 것도 사회주의식 정책이다.
시장 경제에서도 언론 기업같이 공공성이 강한 경우 제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제한은 없을수록 좋다. 기업의 소유 구조는 다양한 방식을 용인해야 한다. 언론사 중에는 사원 소유 회사나 국민주 회사도 있어야 하고 개인 소유 회사도 있어야 한다. 심지어 사주가 편집국장을 하는 언론사도 허용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허용하고 경쟁에서 도태되도록 해야지 정부가 법으로 다 하겠다는 것은 낡은 사회주의 방식이다.
정부가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은 김의장이 몸 담았던 과거 정권 때 더 심하지 않았나?
당시는 후진국 초기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그러나 사회가 어느 수준에 오르면 변해야 한다. 가령 교육 정책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고교 평준화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골고루 교육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의 질 향상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가 엄청나게 커졌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해야지 계속 평준화 정책을 고수해서는 국민들의 욕구를 담아 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육이 늘어나고 교육 이민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DJ 정권을 페론주의라고 비판한 근거는?
DJ의 정치하는 방식이 대중에 영합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식이다. 지난 총선 때나 이번 언론사 세무 조사 때 시민단체를 자극하고 선동하지 않았나. 사회 복지 분야에서도 제도는 정비하지 않고 돈을 풀어서 대중에 영합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나 교육 예산에 대한 무리한 공약도 돈만 풀어서 생색 내자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도 인기 영합 정책이다.
페론은 노조의 강력한 지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DJ 정권은 노조나 시민단체로부터 배신자라고 비판받는 상황 아닌가?
무리하게 대중에게 영합하려다 보니 겉 다르고 속 다른 정책을 폈다. 주5일 근무제가 대표적인 예다.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부작용이 걱정되니까 월차도 없애고 생리휴가도 무급으로 한 것 아닌가.
이재오 총무가 대통령 탄핵 얘기를 꺼내자 김의장도 동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대통령 탄핵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탄핵론은 현정부에 대한 경고 정도로 보면 된다. 실제로 탄핵 문제를 검토하겠다는 얘기는 너무 나간 것 같다. 내가 탄핵론에 동의했다는 것은 오해다. 당직자 회의에서 이총무가 탄핵론을 꺼내기에 '와히드 꼴 나는 거 아냐'라고 농담 한 마디 던진 건데 확대 해석되었다.
한나라당은 보수 정당인가?
개인적으로는 국민 대다수를 대변하는 폭넓은 중도 정당, 센트럴리스트(centralist)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같이 변화가 빠르고 사회가 다양해지고 있는 시대에 한 가지 이념 체계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현실에 맞지 않는다. 사안 별로 현실에 가장 맞는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가령 남북 문제에서는 약간 오른쪽으로 가야 하고, 환경 문제나 여성 문제에서는 약간 왼쪽으로 가야 한다.
한나라당 내 개혁파는 특히 남북 문제에서 당이 보수 일변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남북 문제에서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민족주의다. 북한은 여전히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북한이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햇볕정책을 밀고 나가서는 곤란하다. 상호주의가 필요하다. 북한이 변화하도록 압박하고 국제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DJ나 이른바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지난 50년 동안 역대 정권이 대북 압박 정책을 펴왔지만 남북 관계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압박해 온 결과 북한 내부 체제의 모순이 심해지지 않았나. 이제 거의 무너지려고 하는데 햇볕정책이다 금강산 관광이다 해서 DJ 정권이 김정일 체제를 연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단순히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지원은 북한의 변화를 조건으로 걸어야 한다.
북한 체제가 갑자기 붕괴하면 한반도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김정일 체제가 무너지면 전쟁이 일어나거나 북한 사람들이 남으로 밀려 내려와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다 죽는데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나? 흡수 통일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체제가 붕괴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래서 남한이 흡수해야 한다면 비용이 좀 들더라도 흡수하는 것이 북한 동포들을 위하는 길 아닌가. 사회주의 국가들이 많이 무너졌지만 독일은 통일까지 되고 다들 더 좋아졌다.
● 프로필 :
1934년 출생. 경북고등학교. 미국 덴버 대학 경제학과. 미주리 주립 대학원 경제학 박사. 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포항제철 회장. 16대 국회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