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 경계가 무너져 간다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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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워릭 교수, 컴퓨터와 '의사 소통' 실험…
"로봇 지배 피하려면 사람도 업그레이드 돼야"


최근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인공지능)에서는 인간처럼 사고하는 것은 물론 사랑하고 질투하는 감정까지 지닌 로봇이 등장한다. 양엄마를 사랑하고, 사랑을 잃은 뒤에는 질투할 줄도 아는 데이비드는 정말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지능을 가진 로봇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한번 입력되면 평생 그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스필버그 감독은 '로봇이 제아무리 똑똑해지고 인간을 닮으려 해도 프로그래밍을 벗어나지 못하는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생각한 듯하다.


인공 지능과 제어, 로봇공학을 연구하는 케빈 워릭 교수(영국 레딩 대학·인공두뇌학)는 스필버그 감독과 생각이 다르다. 그는 로봇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로봇도 프로그래밍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으며, 생명체처럼 진화한다고 믿는다. 그는 "로봇이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라고 말했다.


워릭 교수는 '앞으로만 가고 어떤 것에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목표를 프로그래밍해 난쟁이 로봇들을 만든 적이 있다. 장애물이 가득한 방안에 로봇들을 처음 풀어놓자 로봇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경망이라는 전자 두뇌를 이용해 자신의 실패를 기억해 냈고, 똑같은 상황에 부딪히자 장애물을 피해 가는 전략을 마련했다. 로봇들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새로운 지혜를 배웠던 것이다.


이 로봇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로봇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워릭 교수는 "학습할 줄 아는 로봇들은 내가 입력하지 않은 행동도 한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점점 똑똑해진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수백만 년을 진화한 것처럼, 로봇도 환경에 더 잘 적응하려고 자신의 신경 네트워크를 재조직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인간이 조금만 도우면 기계를 진화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등장했다. 몇 년 이내에는 인간이 전혀 돕지 않아도 기계를 진화시키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될 것이라고 워릭 교수는 내다본다. 학습할 수 있는 로봇이 감정을 갖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처럼 현재 로봇공학은 지능과 감정을 가진 로봇을 창조해 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공상과학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인간에게 대항하는 로봇도 출현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워릭 교수는 "그렇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기계가 인간보다 똑똑해진다면 인간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고 예견한다. 〈혹성 탈출〉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고릴라가 어린 아이를 애완 동물로 부리듯, 로봇이 인간을 애완 동물 다루듯 하거나 농장에서 사육할 수도 있다.




그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는 것이 워릭 교수의 생각이다. 워릭 교수는 "기계가 지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는 것도 선택할 여지가 없다. 인간을 사이보그로 업그레이드시켜야 로봇에 뒤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인간을 기계와 직접 연결해 기계의 지적 능력을 지배한다면,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당하는 불행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초음파를 느끼고, 적외선을 볼 수 있고, 로봇처럼 다차원으로 사고하게 된다면 로봇과의 대결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 게다가 사람의 뇌를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와 연결해 필요한 정보를 수시로 내려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워릭 교수가 '기계와 소통하는 인간 실험'을 고집하는 까닭이다.


워릭 교수는 기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첫 실험으로 1998년 자신의 팔뚝에 실리콘 칩으로 된 자동 신호 응답기를 이식했다. 이 칩의 도움을 받아 워릭 교수는 레딩 대학 인공두뇌학과 건물 내 컴퓨터 시스템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가 현관에 서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거나 닫혔고, 불이 켜지거나 난로가 작동했다.


"'반 인간 반 기계' 사이보그도 20년 뒤에 등장"




워릭 교수는 오는 11월에 이 실험을 좀더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자신의 팔과 다른 사람의 팔에 칩을 이식하여 서로의 신경 시스템을 연결하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예정이다. 그는 지난 1월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아내와 함께 실험하겠다고 밝혔지만, 최근 인터뷰에서는 실험 상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98년 실험에서 근육에 칩을 이식했으나, 이번에는 신경 시스템에 바로 무선 송수신 칩을 이식할 예정이다. 칩을 신경 시스템에 바로 연결하면 그가 움직이거나 생각하고 표현하는 감정 신호가 신경을 거쳐 컴퓨터에 저장된다. 그 데이터는 다시 다른 사람의 몸 속에 이식된 칩으로 그 신호를 보내 어떤 반응을 유발하게 된다.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워릭 교수의 팔 움직임이 상대방 팔의 움직임을 유발할지, 또 워릭 교수가 고통스러워할 때 상대방이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또 이 실험으로 인해 워릭 교수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예측 불가능하다.


워릭 교수는 이 실험이 끼칠 해보다는 긍정적인 결과에 더 주목한다. 몸 안에 칩을 삽입해서 주변 컴퓨터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다면, 사고로 척수 힘줄이 망가진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 같은 중증 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칩을 신경 시스템에 바로 연결하면 인간에게 새로운 경험을 할 세계를 열어줄 가능성도 있다. 초음파나 적외선 같은 감각이 부가적으로 입력되어 인간은 더 많은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워릭 교수가 무엇보다 흥분하는 대목은 말을 하지 않고도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워릭 교수는 "언어를 이용한 의사 소통은 느리고 복잡하다. 서로의 생각이 뇌에서 뇌로 곧바로 전달되는 시스템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실험이 성공한 뒤 뇌에 칩을 이식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면 속 다르고 겉 다른 말들이 오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워릭 교수는 20년이나 30년 뒤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한다. 갖은 능력을 배가시킨 '반 인간 반 기계' 형태의 사이보그도 20년쯤 지나면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워릭 교수의 새 실험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첫 번째 시도가 될 것이다. 워릭 교수는 지난 8월 5일 대전 사이언스 페스티벌 2001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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