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모르모트' 안전에 이상 없나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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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임상 시험 100여 건 진행중…

미국 10년간 8명 사망, 한국은 피해 사례 없어


김영철씨(가명·26·대학생)는 최근 국내 한 제약회사가 개발한 신약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새로 개발한 발기 부전 치료제가 인체에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건강한 20·3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


이전에 임상 시험에 참여했던 선배가 '이틀만 입원하면 몇십만 원을 벌 수 있는 짭짤한 아르바이트'라며 권유했다. 처음에는 '마루타식 생체 실험'이 아닌가 싶어 갈등했다. 그러나 임상 시험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니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의서에 서명한 뒤 김씨는 시험에 적합한 건강 상태인가를 판별하는 검사를 1시간 30분쯤 받았다. 검사 종류는 일반적인 건강 검진과 비슷했다. 김씨는 검사 받은 열흘 뒤 병원으로부터 '시험을 해야 하니 입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입원한 김씨는 심전도·혈압·호흡 수 등을 체크하는 모니터와 몸을 연결하고, 이동식 혈압기와 심장지수를 측정하는 전극을 몸에 달았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시험자와 장기를 두거나 병원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입원 첫날에는 시험에 필요한 몸 상태를 만드는 일이 전부였다. 저녁에 금식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몸 상태를 점검한 뒤, 간호사가 주는 약을 먹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정제 형태의 약을 한 알 먹었다. 약을 먹고 30분 뒤 채혈을 했다. 하루에 여섯 번 피를 뽑았지만, 뽑은 피는 한 번 헌혈했을 때의 절반인 200cc 정도였다. 혈액과 함께 소변도 시간을 정해 놓고 채취했다. 체내에 흡수된 약이 시력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력 검사와 색각 검사, 심전도 검사 도 받았다. 김씨는 이틀을 꼬박 병원에 입원한 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퇴원했다. 퇴원하면서 김씨는 "임상 시험이 이렇게 쉽고 위험하지 않다면 다음에 또 자원하겠다"라고 말했다.


최근 지원자 공개 모집이 늘면서 임상 시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전에는 임상 시험이 많지 않아서 병원 외래 환자나 연구자 주변 인물들이 주로 실험 대상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국내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요즘에는 지원자 수요가 달려 공개 모집하는 추세이다. 최근 국내에서 진행 중인 임상 시험은 100여 건이어서 수천 명이 '온몸'으로 신약 개발에 기여하고 있다.


발기 부전 치료제 시험에 지원자 줄이어




임상 시험은 대개 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지만, 김씨 경우처럼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도 있다(84쪽 상자 기사 참조). 따라서 원한다면 환자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임상 시험 대상자가 될 수 있다. 건강 검진을 공짜로 받을 수 있는 데다 사례비도 챙길 수 있어 일거양득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3일간 입원하는 시험에 참여할 경우 사례비로 40만∼50만 원을 받는다. 시험 기간이 길어 1주일간 입원할 경우에는 사례비가 100만원을 웃돈다. 신상구 교수(서울대병원 임상시험센터장)는 "사례비를 겨냥하고 임상 시험에 여러 번 지원하는 '단골'도 있다. 그러나 다른 시험에 참여한 지 3개월이 지나야 다시 시험에 참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모든 임상 시험이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는 다른 외래 치료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내복약이나 치료제를 받고, 채혈이나 컴퓨터단층촬영 따위 검사를 통해 변화를 점검한다. 평소에는 받아온 약을 먹거나 처치하면서 투약 일지만 꼼꼼하게 작성하면 된다.




제2상과 제3상 시험에 지원하는 환자는 다른 치료 방법이 없거나, 새로운 치료약을 한 발짝 앞서 경험하기 위해 임상 시험에 지원한다. 먹는 약에 대해 거부 반응이 있는 이상인씨(51·서울시 동작구 흑석동)는 얼마 전 패치형 여성 호르몬제 임상 시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씨는 2년 전부터 호르몬이 부족해 골다공증에 시달렸는데, 약만 먹으면 토하고 위장 장애가 일어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파스처럼 붙이는 호르몬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 임상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씨는 "허가된 약품이 아니어서 부작용이 일어날까 불안했지만, 부작용이 생기면 도중에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임상 시험에 지원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임상 시험 덕분에 자신에게 꼭 맞는 치료법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신약'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임상 시험에 자원하는 이도 있다. 최근 안태영 교수(울산의대·서울중앙병원 비뇨기과) 등이 공개 모집한 '홍삼 발기 부전 치료제' 임상 시험에는 '고개 숙인' 남성 환자가 줄을 이었다. 안교수는 "홍삼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쓴 신약이어서 거부감이나 불안감이 덜해 지원자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지원자 중에는 성적 갈등으로 여러 차례 이혼하고 재혼한 남성도 있다. 그는 "결혼 생활을 원만하게 하려면 성적 능력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다른 약과 달리 항암제는 대부분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시험이 이루어진다. 김미경씨(45·서울 강서구 가양동)도 다른 치료법이 없어서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임상 시험을 선택했다. 지난 4월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김씨는 수술 시기를 놓쳐 치료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담당 의사로부터 임상 시험 제의를 받았다. 김씨는 "어차피 6개월에서 1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면 새로운 약이라도 써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약값과 검사비를 제약회사가 부담한다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라고 털어놓았다.


환자 권리 제대로 보호받기 힘들어




그러나 임상 시험이 이처럼 '천사의 얼굴'만 갖고 있는 것일까. 그 동안 한국에서는 각종 신약 개발과 수입 의약품 검증을 위해 임상 시험이 수백 건 실시되었지만, 피해나 보상 사례가 보고된 적이 단 한 건도 없다.


하지만 이 수치에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래 전에 임상 시험이 정착된 미국에서도 임상 시험 피해 사례가 간혹 나타나고 있다. 미국 임상 시험 감시 기관인 인체실험보호국(OHRP)에 따르면, 1991∼2000년 진행된 임상 시험 가운데 부작용 '사고'가 8백78건 있었는데, 그 가운데 8건은 사망 사고다. 임상 시험으로 인해 새로운 병을 얻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는 임상 시험이 해마다 6만 건 가량 진행된다. 지난해 미국 국립보건원 조사에서는 임상 시험이 상업적·경쟁적으로 변하면서 위험 소지가 있거나 부적합한 환자까지 종종 의사의 강압에 못 이겨 실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실험의 안전성이나 효능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품질 검사를 하지 않고 즉석에서 제조한 약품으로 시험한 경우도 있다. 임상시험평가위원회가 잘못 판단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도 간혹 있다.


유독 한국만이 이런 문제로부터 비켜갈 수 있다고 큰소리칠 수 있을까. 식품의약청 명경민씨(의약품 안전과)는 "시험 시행자가 가이드라인을 잘 지키고, 감독을 잘 하면 문제될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이 잘 지켜지고 있고, 감독 또한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선생님 뜻대로 하세요'라며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현실에서 '임상 시험 환자의 권리'는 보호받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송시영 교수(연세의대·내과)는 "환자 스스로 실험의 안전성이나 필요성을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의사가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환자 의향이 달라지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임상시험평가위원회가 자원자가 어떻게 동의하고 연구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평가하기도 쉽지 않다고 송교수는 덧붙였다. 한독약품 중앙연구소 이일섭 소장도 "환자 스스로 임상 시험의 안전성을 평가해 지원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시험 설명서를 쉽게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한국도 이제 임상 시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여서 앞으로 함량 미달 임상 시험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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