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의 마법…‘저녁 있는 삶’이 지닌 무한 경쟁력

[이미리의 요즘 애들 요즘 생각]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

2019-04-16     이미리 문토 대표

반전 있는 사람이 좋다. 마치 영화 《패터슨》의 버스운전사 ‘패터슨’처럼. 버스를 운전하면서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 말이다. 패터슨처럼 일상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살고 싶다고 떠올리다 패터슨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일상은 단순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구간을 운전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해 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같은 시간에 맥줏집에 간다. 이렇게 지루한 삶에 시적인 순간들이 깃든다니! 하지만 곧 깨닫는 것이 있다. 일상의 낭만을 즐기고 무용한 것들에 마음껏 마음을 빼앗기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심리적·물리적 여유라는 사실이다.

종종 ‘소셜 살롱의 가장 큰 경쟁사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회사’라 답한다.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수긍한다는 점이다. 아마 누구나 생활 속에서 몸소 경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소셜 살롱의 가장 큰 자랑은 높은 참여율이다. 더러 발생하는 불참 사유는 십중팔구 야근 때문이다. 심지어 때론 휴일까지도.

패터슨이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한 노동 조건으로 악명 높은 한국 운수산업의 종사자였다면, 혹은 업무시간도 모자라 퇴근 후까지 업무지시가 날아오는 단톡방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였다면 말이다. 잠자기 바빠 순간을 오롯이 즐기며, 곁을 스쳐간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시로 옮기는 낭만을 누리긴 어려웠을 거다. 

지난 3월31일부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주 52시간제 계도기간이 끝났다. 내년부터는 50인에서 299인까지의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종일 노동의 시대’가 저물고 ‘저녁이 있는 삶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

녹초 상태에서 아이디어 떠올릴 수 없어

2000년 세계 글로벌 브랜드 랭킹 1위는 코카콜라, 2위는 마이크로소프트(MS), 3위는 IBM, 4위는 인텔, 뒤를 이어 노키아와 GE가 있었다. 대부분 하드웨어 기반 제조업 회사다. 그러나 작년 MS와 코카콜라를 뺀 나머지 모든 회사들이 10위권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는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회사들이 차지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패터슨이 빼곡히 시를 적어 두던 습작노트를 완전히 못 쓰게 되어 상심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이렇게 위로한다. 빼곡히 적힌 페이지처럼 빼곡히 쌓는 것들이 가치를 보장하던 시대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일하고, 아주 많은 것들을 축적하는 것이 그 자체로 성장을 담보하던 시대다. 지금은 아니다. 남과 다른 생각이, 새로운 상상과 경험이 더 큰 가치와 성장을 보장한다. 아마존이 그렇고, 애플이 그렇다.

주 52시간 제도의 정착은 우리 사회가 기존의 관성을 벗어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선제적 조치다. 누구도 과로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없다. 패터슨 시의 어느 현자의 말처럼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는 법이다.